6월 6일은 음력으로 5월 5일, 단오명절이었습니다. 단오명절은 고려 시대의 9대 명절에 속하는 설날, 한식, 추석과 함께 4대 명절에 들었다고도 합니다. 단오명절은 일 년 중에서 양기가 가장 왕성한 날이라 해서 큰 명절로 생각하며 여러 가지 전통 풍속 행사가 내려오고 있습니다.
특히 부녀자들은 단오장이라 하여 창포 뿌리를 잘라 비녀를 만들어 머리에 꽂아 두통과 재앙을 막고 창포를 삶은 물에 머리를 감아 윤기를 내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단오 전에 약쑥과 익모초 찔레꽃 등을 따서 건조해 두었다가 말린 쑥으로는 뜸 치료도 하고 쑥 베게와 쑥 방석을 만들어 신경통과 관절염을 예방, 치료했으며 말린 익모초를 달여 먹기도 하고 환으로 만들어 먹어 부인병 예방과 간치료에도 사용했다고 합니다.
5월 단오명절에는 어머니가 쑥을 뜯어다가 끓는 물에 삶아 쌀가루와 버무려 만들어 준 쑥떡을 맛있게 먹으며 여인들이 발로 힘껏 그네를 차는 모습을 보며 깔깔 웃기도 했고 씨름을 구경하며 나도 크면 힘 장수가 되겠다고 해 동네 아저씨들을 웃기기도 했고 윷놀이에 안 끼워 준다고 떼를 쓰며 울기도 했었는데 그 추억은 모두 지나간 하나의 옛말이 된듯합니다.
설날이나 추석명절처럼 이번 단오명절에도 남한 시민들은 벌써 금요일 오후부터 서울을 떠나 지방으로 내려가는 차들로 고속도로마다 막힐 지경이었습니다. 저는 텔레비전 뉴스를 통해 도로가 막혀 천천히 움직이는 많은 차들을 보며 해마다 명절이 되면 그러하듯이 잠깐 고향 생각을 했었습니다.
저에게는 5월 5일 단오명절 하면 내 눈에 흙이 들어갈 때까지 잊을 수 없는 가슴 아픈 추억이 있습니다. 책상에 컴퓨터를 마주하고 앉아 바람개비처럼 움직이는 아들의 팔과 얼굴의 상처를 다시 한 번 새삼스럽게 한참을 보았습니다. 아무 말 없이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하는 저에게 아들은 무슨 할 말이 있느냐고 물어왔습니다.
저는 그저 아니라고 하고는 조용히 베란다 창문으로 갔습니다. 늦은 밤이라 하늘에는 별들이 촘촘히 떠 있었습니다. 혼자서 북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때도 바로 지금 이맘 때였습니다. 먹을 것이 부족해 능쟁이를 먹고 죽을 고비를 넘겨야 했던 아들, 그 때부터 아들은 지금까지도 쑥떡을 비롯한 들나물과 산나물은 입에 대지도 않습니다.
삼복더위의 뜨거운 햇볕에도 긴팔 소매가 달린 옷을 입어야만 하는 아들, 항상 팔소매가 짧은 티셔츠를 입어 보는 것이 소원이라고 하는 말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쓰리고 아픕니다. 이곳 한국에서는 쑥떡을 별미나 건강식품으로 생각하고 먹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에도 단오명절에는 별미로 쑥떡을 먹는 줄 알고 있었는데 어느 날부터인지 쑥은 북한주민들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식량 대용으로 먹고 있습니다.
퉁퉁 부어 오른 아들을 등에 업고 평양시 피부성 병원으로 달려갔을 때 식량 대신 쑥을 너무 먹어 쑥 중독으로 아들처럼 온몸이 퉁퉁 부었다가 내리면서 한쪽 코가 문드러져 없어진 한 할머니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때 저는 화장실에 가서 남모르게 저 할머니처럼 아들도 저런 상처자국이 남지 않을까 싶어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결국 시간이 흐른 뒤 아들의 양쪽 얼굴과 두 팔에는 피할 수 없는 상처가 남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대한민국에 와서 늠름한 성인이 되어 너무도 당당한 모습으로 적응하는 아들을 바라보면 무척 대견합니다. 그리고 열악한 북한 사회에서 너무 어린 나이에 철이 들었고 너무 어린 나이에 마음의 상처를 안겨 준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저는 마음이 아픕니다.
5월 단오 전에는 풀에 독이 없다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오늘도 북한 시민들은 뙤약볕에 진땀을 흘리며 하루 생계를 위해 산으로 들판으로 식량대용 나물을 찾아 헤매고 있을 것입니다.
어김없이 찾아온 올해 단오명절, 친구들과 함께 쑥떡과 부추 전을 부쳐 마을 뒷산 정자에 앉아 수다를 떨면서 막걸리 한잔 마시며 보냈던 즐거운 시간이 왠지 미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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