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엔 마을 거리 곳곳에 빨간 장미꽃이 활짝 피어 아름답습니다. 아름다운 거리와 마을 주변을 바라볼 때마다 제 마음은 항상 즐겁습니다. 제가 남한에 처음도착했던 시절도 바로 빨간 장미꽃이 만발하게 피어 있던 6월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해마다 6월이 오면 마음이 설레고 즐거워집니다. 오늘도 퇴근길에 저는 친구들과 빨간 장미꽃을 보며 한마디씩 했습니다. 한 친구는 공주병에 걸린 듯 자기가 마치 장미꽃처럼 아름답고 예쁘다고 했고, 남한에서 태를 묻고 살고 있는 한 친구는 결혼기념일마다 장미꽃 1000송이를 남편한데서 받아왔지만, 싫증나지 않는 정말 예쁜 꽃이라고 했습니다.
북한에도 '장미꽃이 아름답다고 함부로 손대지 말라,'라는 유머가 있습니다. 이 말은 아름다운 꽃을 함부로 얕잡아 보고 꺾다가는 가시에 찔린다는 말입니다. 이런 저런 수다를 덜면서 어느덧 마을까지 왔습니다. 우리가 각자 집으로 헤어지기 아쉬운 표정으로 머뭇거리자 남한에 온 지 얼마 안되는 친구가 저녁을 산다면서 음식점으로 가자고 했습니다.
오늘은 조금 피곤했던 참이라 저는 음식점으로 가지 말고, 장미꽃 향기를 맡으면서 마을 공원에 앉아 막걸리나 마시자고 했더니 친구들은 오히려 더 좋다고 했습니다. 저는 재빠르게 집으로 달려가 북한 명태를 들고 나왔습니다. 고향 음식이라 모두 좋아했습니다.
새로 온 친구는 집에 들어가 맛있는 배를 깎아 접시에 담아 들고 나왔고, 친구 영숙이는 막걸리 3병과 깡통 맥주에 오징어를 들고 나왔습니다. 하여 우리는 그야말로 장미꽃 축제를 벌인 듯 햬습니다. 장미 꽃 향기와 더불어 시원한 막걸리를 한 컵 쭉 들이마시니 그야말로 기분이 더할 나위 없이 좋았습니다.
여자 셋이 모이면 먹는 소리로 시작해 애기 낳는 소리로 끝난다는 속담이 있듯이 우리는 처음엔 회사 일로 말을 시작했습니다. 자동차 핸들 수봉제 작업을 배웠는데 조금 힘들고 어려웠다는 둥, 작업을 아주 재미있게 잘 가르쳐 준다는 둥, 서로 각기 성격도 다르고, 고향과 문화적 환경이 다른 곳에서 살다온 사람들이 모여서 일을 배웠지만, 아주 즐겁고 재미있었다는 둥 회사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한참을 회사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던 중에 친구 영숙이가 갑자기 남편 얘기를 꺼냈습니다. 요즘 밉게 노는 남편이 얄미워 죽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남한에 온 지 얼마 안되는 친구 선옥이는 남편이 없으니 남편 흉볼 일이 없어서 서운하다면서 북한에서 있었던 옛 추억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롱조롱 딸 셋을 데리고 살기 어려웠던 북한에서의 생활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힘들었다고 했습니다.
당시 5살이었던 막내딸과 7살이었던 둘째 딸을 남의 집에 입양을 보냈는데 몇 달이 안돼 그 어린 아이들이 다시 엄마를 찾아왔다고 했습니다. 세 딸과 시장을 헤매던 그 친구는 어느 날, 빵을 열심히 팔고 있는 빵 장사꾼에게 자루에 돌과 휴지를 넣은 자루를 들고 가 미역을 가져 왔으니 빵과 교환하자고 말했다고 합니다. 빵 장사꾼은 진짜 미역인 줄 알고 보지도 않고 빵을 세어 주었다고 합니다. 빵을 받아든 그 친구는 정신없이 줄행랑을 쳐서 집으로 왔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 말을 듣고 배를 움켜잡고 웃었지만, 그저 즐겁게 웃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저는 당시 그 친구의 심정을 누구보다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배고프고 굶주림에 시달렸으면 저랬을까? 생각하니 마음 한구석이 아파왔습니다. 그 친구는 지금 그때처럼 그런 사기를 치라고 하면 못하겠다고 했습니다.
또 한번은 먹고 살기가 너무 어려워 어린 딸 셋을 버리고 중국으로 탈북했다가 1년 만에 북한으로 아이들을 찾으러 다시 갔었다고 합니다. 식량을 얻어 가지고 돌아오겠다고 집을 떠난 엄마를 기다리다가 지친 어린 딸들은 여름이면 강냉이 밭에서 강냉이를 훔쳐 먹고 시장과 길거리를 전전하면서 꽃제비가 되어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굶어 죽지 않고 살아준 것만으로도 너무 고마웠다고 했습니다. 그 친구는 버렸다가 다시 찾은 딸들을 데리고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탈북해 이곳 남한으로 왔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 친구 얘기를 눈물을 훔쳤습니다. 저도 그 친구가 겪었던 것과 비슷한 아픔이 있기 때문입니다. 정든 고향을 떠나 온가족이 이산가족이 아닌 이산가족이 돼어 피눈물을 흘린 날이 그 얼마이며 죽지 않고 살아서 다시 이 엄마의 품으로 돌아온 우리 아이들이 정말 고마울 때가 한두번이 아닙니다. 우리 가족은 다행히 다시 만나 남한에서 오붓하게 살고 있지만, 아직도 중국을 비롯한 제 3국에서 따스한 보금자리를 찾아 헤매고 있을 탈북여성들을 생각하면 제가 누리고 있는 소박한 행복이 미안하고, 마음이 아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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