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저는 고향에 있는 언니와 전화 통화를 했습니다. 벌써 언니의 나이는 67세네요. 사실 이곳 남한 같으면 한창 활동할 만한 나이건만 제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관절암에 걸려 걸음을 잘 걷지 못한다고 하네요. 3년 만에 언니의 녹음으로 된 목소리를 듣는 순간 눈물이 앞을 가렸습니다.
지난 8월에 형부는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더 마음 아픈 것은 언니는 평양시민증을 보안원에게 빼앗겨 가까운 평양시 주변에도 홀로는 다닐 수가 없다고 합니다. 이번 사건은 전부터 연락을 취하던 탈북 브로커가 단속에 걸리면서 언니의 이름을 밝혔다고 합니다. 심지어 한 집에서 살고 있는 12살 철없는 손자도 보안원에게 끌려가 조사를 받았다고 합니다.
언니는 군에서 제대되어 주체사상탑에서 근무하는 아들에게 부표를 붙여 겨우 국경연선지역에 사는 친척방문 허가를 받아 국경지역에 나왔다고 합니다, 어찌 보면 이번이 언니와는 마지막 통화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더더욱 눈물이 났습니다. 언니는 딸 6형제와 아들 1명 7남매 중 맏이로 태어나 우리 형제들에게 때로는 강한 모습으로, 때로는 부모님의 모습으로 아버지 대신 어머님 대신해 주었습니다.
언니의 녹음된 목소리를 들으며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아주 어린 시절 야간 일을 하고 있는 어머님 대신 앞이 잘 보이지 않는 캄캄한 밤에 언니는 넷째 동생을 등에 업고 집주변 야산을 넘고 있는데 갑자기 짐승 울음소리가 났거든요. 언니의 뒤에서 걷던 저는 겁에 질려 그만 그 자리에 주저앉았습니다. 언니는 저의 손목을 꼭 잡아 주면서 작은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 주었습니다.
집에 도착해 보니 시간은 퍽 걸려 새벽 1시가 되었습니다. 집에 도착해 언니는 세상 모르고 쌕쌕 자고 있는 동생을 등에서 내려 침대에 눕히고는 제 등을 두드려 안심을 시켜주었습니다. 당시 언니의 나이는 10살 이었고 제 나이는 6살 이였거든요.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다시 국제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조카의 목소리였습니다. 이모가 보내준 돈을 잘 받았다고 그리고 고맙다고 하면서 만나는 그날까지 아프지 말고 건강해서 오래 오래 살아야 한다고 울음 섞인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다시 한 번 눈물을 흘렸습니다. 인제는 아빠도 없는 엄마, 또 많이 아프고 나이 들어가는 엄마를 잘 모시라고 부탁을 했거든요.
비극도 이런 비극이 어디 있는지, 왜 이런 아픔을 겪어야 하는지, 전화로도 하고 싶은 말을 마음대로 편하게 할 수 없는 남과 북, 마음이 아프고 눈물만 나옵니다. 행동 하나하나에 누구의 감시를 받아야 하는 세상, 그 장벽이 무너질 날은 언제일까. 생각하면 할수록 눈물이 납니다.
15살 나이에 헤어진 조카의 목소리는 이제 의젓한 아저씨의 목소리입니다. 언니에게는 두 딸이 있습니다. 아들을 낳지 못했다는 마음에 두 아들을 입양했거든요. 큰 아들은 3년 전 출근길에 사고로 죽었습니다. 이번에 전화로 통화한 조카는 입양 당시 6개월이었습니다. 24시간 열차 여행에 이모인 제 젖을 먹이며 안고 왔지요.
하기에 저에게는 다른 조카들보다도 조금은 특별한 조카입니다. 이제는 성인이 되어 장가도 갔고 아기 아빠가 되었다고 합니다. 사진 한 장 보내 달라고 부탁도 했습니다. 다시는 언니와 통화를 하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을 하니 너무도 마음이 아프고 쓰렸습니다.
고향에 가서 살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냥 고향에 한 번 가보고 싶다는 작은 소망, 부모님의 묘소에 한 번 가보고 싶고 그냥 죽기 전에 형제들을 한 번 만나 맛있는 고향 음식을 먹으며 지나간 추억을 하고 싶은 아주 작은 소망도 이룰 수 없다는 생각을 하니 더더욱 마음이 아픕니다. 서울에서 김춘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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