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터에서 만난 고향 어르신

11일 오전 중구 대한적십자사 이산가족 상봉 신청 접수처에서 김영현 할아버지가 6.25 전쟁 때 헤어진 가족을 찾기 위해 신청서를 작성하고 있다.
11일 오전 중구 대한적십자사 이산가족 상봉 신청 접수처에서 김영현 할아버지가 6.25 전쟁 때 헤어진 가족을 찾기 위해 신청서를 작성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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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이든 도시든, 동네마다 아파트 단지마다 그 어디에 가든지 대한민국 곳곳은 지금 꽃 속에 잠겨 있어 보는 이들을 즐겁고 기쁘게 해줍니다. 제가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 울타리에도 빨간 장미꽃으로 뒤덮여 있어 아침저녁으로 주민들의 출근길과 퇴근길을 기쁘게 해주고 있습니다.

지난 주말 저는 손녀딸의 손목을 잡고 동네 몇 바퀴를 돌며 장미꽃 향도 맡아보고 장미꽃 속에 묻힌 채 손전화기로 기념사진도 한 장 찰칵했습니다. 한참을 꽃구경한 뒤 동네 공원으로 갔습니다. 미끄럼을 타고 있는 손자 녀석을 열심히 지켜보는 할머니도 계시는가 하면 등 뒤에서 그네를 밀어 주고 있는 젊은 아기 엄마도 있었고 밀차에 태운 아기를 재우느라 열심히 자장가를 불러 주고 있는 아기 엄마도 있었습니다.

미끄럼을 타고 있던 저의 손녀도 어느새 그네에 앉았습니다. 무서운 줄 모르고 어른 키만큼 높이 오르고 있는 손녀가 대견하기도 했고 귀엽기도 하고 자랑스럽기도 했습니다. 그네를 타고 있는 손녀를 바라보면서 잠깐 사색을 하고 있는데 옆에 앉아 있던 어르신 한분이 어찌되면 이번 금강산 관광과 이산가족 방문이 재개될 것 같다는 말을 하고 있었습니다. 순간 나 자신도 모르게 머리를 돌려 그 어르신을 바라보면서 혹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먼저 어르신에게 고향이 어딘가 하고 물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 어르신은 실향민이었고 고향은 평북도 영변이라고 하셨는데 저의 아버님 고향과 같았고 성씨도 저와 같았습니다. 저 역시 반가웠지만 어르신이 저보다 더 반가워했습니다. 마치 친척이라도 가족이라도 만난 것 같이 말입니다.

어르신은 아마도 고향에 있었다면 지금 이 나이 되도록 살아있을 수가 없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나이 80살을 넘긴 그 어르신은 60년이 지난 세월 중 한순간도 부모 형제들에 대해 잊은 적이 없다고 합니다. 어르신은 형제 중 맏딸로 자랐다고 합니다.

외삼촌 집에 다녀오려고 왔다가 그만 남북이 갈라져 3. 8 군사분계선이 생겨 결국에는 부모 형제가 있는 고향으로 가지 못하고 이곳에 자리를 잡게 됐다고 합니다. 어르신은 한국에서 결혼해 7남매를 슬하에 두었다고 합니다. 자녀들은 항상 통일이 되면 꼭 어머니 고향에 가보는 것이 소원이라고 합니다.

처음에는 북한에 두고 온 가족을 찾아 만나 보려고 이산가족 신청도 해보았지만 북한에서 승인을 하지 않아 접수가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제는 그저 마음속으로 부모님은 세상을 떠나셨을 거라는 생각만 해볼 뿐, 형제들은 아직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 생사를 모르고 사는 인생이 너무 마음이 아프다고 덧붙였습니다.

어르신의 말을 듣는 제 마음 역시 아팠습니다. 그래도 저는 드문드문 전화상으로라도 고향 소식을 들을 수 있지만 60년 세월이 지나도록 고향 소식을 모르고 살아온 그 어르신을 생각하니 남의 일 같지 않고 마음이 더욱 아팠습니다. 어르신은 제가 고향이 평양이고 탈북자라는 말을 들으시더니 너무 고생이 많았을 것이라고 또 잘 왔다고 앞으로는 한 동네에서 친척처럼 지내자고 했습니다. 순간 제 눈에서는 마치 부모님이라도 만난 것처럼 기쁘고 반가운 나머지 눈물이 흘렀습니다. 어르신은 제 손을 꼭 잡아주기도 했습니다.

어르신이 먼저 자리를 뜨신 다음에도 저는 손녀의 그네를 밀어 주면서 잠시 잠깐 지난 어린 시절 부모님 생각과 함께 고향 생각을 했습니다. 어린 시절 어머니는 그네를 타는 제 등 뒤에서 자주 밀어 주셨습니다. 출장이 잦은 아버지를 기다리며 그네를 밀어 주시곤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다른 형제들보다도 저에 대한 사랑이 지극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불효자식이 되어 부모님의 산소에도 가 볼 수 없다고 생각을 하면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것 같답니다. 우리 탈북자들은 얼마만한 시간과 세월이 흘러야 실향민들처럼 이산가족 방문 대열에 설 수 있을까, 언제면 형제들과 시간가는 줄 모르고 지난 날 가슴 아팠던 얘기들을 추억삼아 나눌 수 있을지, 그날이 하루 빨리 다가오기를 손꼽아 기다리며 서울에서 김춘애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