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한 통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오래 전부터 가끔 고향생각이 나면 만나던, 6,25전쟁 시기 이곳 한국으로 오신 실향민이었습니다. 80대 중반 고령인 그 어르신은 고향생각이 난다며 시간이 되면 점심식사를 함께 하자고 하셨습니다. 마침 약속을 잡고 당산역 근처로 갔습니다.
두 분은 함북도 무산이 고향이시고 한 분은 함흥이 고향입니다만 언제나 그 두 분은 형제처럼 함께 다니시거든요. 그 분들의 모습에서 가끔은 고향에 계시는 아버님의 모습이 생각나 가끔 찾아뵙는 분들이기도 합니다만 처음 보는 두 분 역시 낯설지가 않았습니다. 당시 김책공학대학에서 공부를 하던 중 전쟁을 피해 고향으로 갔다가 흥남에서 미군 배를 타고 오는 도중 배안에서 만난 친구들이기에 다른 친구 분들보다 더 각별하다고 합니다.
마침 어르신들은 친목회를 마치고 고향 소식이 궁금해 저를 불렀다고 합니다. 어르신들이 좋아하는 순대국밥을 먹으면서 많은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분들은 이곳 한국에 홀로 내려 왔다고 하네요. 북한에서 김책공대 출신들이라 이곳 한국에 와서는 교사로 근무 했다고 하네요. 몇 년 전 까지 만해도 고향에 있는 형님을 만나러 중국 두만강 기슭에서 하루 종일 고향을 바라보곤 했었는데 안 좋은 건강으로 인해 그나마 강을 사이에 두고 바라볼 수 있었던 고향도 볼 수가 없다고 하면서 못내 아쉬워했습니다.
소박한 순대국밥을 앞에 두고 지나온 무섭고 두렵고 어려웠던 많은 얘기를 나누고 집으로 오는 내내 비록 전쟁을 겪어 보지 못했지만 많은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한창 폭격이 발발하던 1951년 여름의 새벽 방공호 안에서 무서운 공포와 두려움 속에서 언니를 출산 하셨다는 어머님의 얘기가 문득 생각났고 낙동강 전투에서 부상을 입어 정치 공작원으로 활동하신 아버지의 모습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스쳐 지나가기도 했습니다.
같은 민족끼리 싸우게 된 한국전쟁은 남과 북 주민들에게 있어서 잊어서는 안 되는 비극 적인 아픔과 슬픔이기도 합니다. 일제가 패망하고 해방이 되어 불과 5년 만에 일어난 전쟁은 우리 민족의 분열과 적대적인 대립을 더욱 심화시키고 분단의 장벽을 쌓게 되었습니다. 하루아침에 부모와 자식, 가족을 잃고 전쟁 난민과 고아들이 생겨나고 삶의 터전을 잃고 고향을 등지고 떠나야 했고 우리 한반도는 남과 북이 갈라져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아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의 아픔이 가셔지지 않고 있습니다.
아직도 북한의 도발은 어제 오늘 끊이지 않고 이어지고 있습니다. 며칠 전에도 우리 영공을 침공해 정찰한 내용이 기록된 채 무인정찰기가 또 떨어졌습니다. 뿐만아니라 로켓 발사로 인해 우리 국민들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주민들은 굶주림과 배고픔에 시달리고 있지만 주민들과 군인들을 전쟁 공포에로 몰고 가고 있는 북한 독재정권, 미친개에게는 몽둥이찜질이 제격이라는 말이 있듯이 반드시 인민의 심판을 받을 그날은 멀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세계인민들은 북한의 핵실험과 로켓 발사를 규탄하고 북한 주민들의 인권과 민주화를 위해 한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이제라도 북한은 전쟁 준비를 그만 두고 인민들의 삶의 질을 강화하고 북한 주민들의 인권과 민주화를 실현해야 합니다. 전쟁도 아닌 오늘과 같은 평화 시기에 북한 주민들은 굶주림과 어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또 자유를 찾아 목숨을 걸고 탈출해 제 삼국을 통해 이곳 자유민주주의를 찾아옵니다.
얼마 전에도 임진강으로 직접 헤엄쳐 이곳 한국으로 온 북한 주민을 텔레비전으로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가족과 고향을 버리고 자유를 찾아 홀로 넓고 깊은 임진강으로 헤엄쳐 왔다는 생각과 함께 얼마나 두려웠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실향민 어르신들과 함께 짧은 시간이나마 6,25 전쟁 얘기를 나누면서 행복한 생활에 도취되어 잠깐이나마 잊고 살았던 나라를 위해 목숨 걸고 싸우신 순국선열들과 호국 영령들의 희생정신을 돌이켜 보았습니다. 다시는 우리 한반도에서 전쟁의 비극이 되풀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가져 봅니다. 서울에서 김춘애입니다.
0:00 / 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