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저는 요양보호사 국가 자격시험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1개월 동안 새로운 도전과 함께 새로운 친구들과 요양학원을 다녔거든요, 처음에는 조금 낯설기도 했습니다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면서 점점 즐거웠습니다. 학원 친구들은 50대 에서 60대 중반 사이었기에 더더욱 친해졌습니다. 점심시간에는 학원 내에서 직접 전기밥솥에 밥을 지어 먹었거든요,
집에서 가져온 반찬에 학원 식탁에 빙 둘러 앉아 식사를 하다 보면 서로의 음식 솜씨가 표현되고 평가도 있습니다만 그야말로 한 가족이 따로 없었습니다. 학원을 마치고 요양원실습도 함께 했습니다. 지난주에는 '큰 나무 주간 보호 센터'에 2일간 요양보호사 실습을 다녀왔습니다.
아침 일찍 전철을 타고 1시간 30분 소요되는 요양보호센터에 도착 했습니다. 경치도 좋았지만 공기 또한 좋은 곳이었습니다. 미리 도착한 저는 원장님과의 인사를 나누고는 창문을 활짝 열어 맑은 공기로 바꾸기도 했고 미세먼지가 들어오지 않도록 창문턱 먼지도 깨끗하게 닦아냈습니다. 오전 9시가 되자 어르신들이 시설 차를 타고 들어오기 시작 했습니다. 30명이 되는 어르신들의 나이는 80세 이상이다 보니 홀로 걷기가 매우 불편해합니다.
차에서 내리시는 어르신들을 한명씩 부축해 실내로 모시고 들어가 소파에 앉혔습니다. 각자 지정된 자리가 있었거든요. 몸이 잘 따라 주지 않고 불편해 하시는 어르신들을 보니 고향 생각도 나고 부모님 생각도 났습니다. 그분들 속에는 저의 어머님과 닮은 어르신이 있었는데 마치 고향에 계시는 어머님 보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첫날에는 어르신들이 드실 매실도 직접 우리 손으로 따서 담갔고 매실장아찌도 담갔습니다. 점심시간에는 어르신들이 식사를 잘 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했고 퍼즐 맞추기에도 도와주었습니다. 때로는 어린 아이들 같기도 했습니다. 드디어 웃음 치료 시간이 왔습니다. 아리랑 노래에 맞추어 손, 팔, 다리 운동 동작도 있었고 어르신들의 기억력을 테스트 하는 동작도 있었거든요.
그야말로 천진난만한 어린 애들 같이 맑고 순진하고 밝았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들과 함께 손동작을 하나하나 익혀 가느라 오히려 제가 더 어려웠던 것 같네요. 맨 뒤에 앉았던 우리 팀이 드디어 강사님의 눈에 띄어 어르신들 앞에서 모범 동작을 하게 됐습니다. 강사님의 아리랑 노래에 맞추어 동작을 하나하나 하던 중 제가 북한 춤을 추었거든요.
어르신들이 하나 같이 좋아라 박수를 치며 장단을 맞추어 주었습니다. 그중에는 고향이 북한인 실향민도 있었습니다. 이름도 고향도 잘 모르는 그 어르신은 제 손목을 꼭 잡아 주기도 했습니다. 비록 소통이 잘 안 되는 어르신들이었지만 2일 동안 함께한 그분들의 모습에서 고향 생각과 함께 부모님 생각이 여느 때보다 간절했습니다.
어느덧 시간이 되어 어르신들을 집으로 보내고는 그분들의 내일을 위해 주간보호센터를 깨끗이 청소를 진행하고 원장님과 또한 자원 봉사자들 그리고 함께 실습한 친구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원장님과 자원봉사자들은 어렵고 힘든 고비를 넘어 온 귀중한 분을 만나 더더욱 특별한 시간이 되었다고 하시면서 또한 헤어짐이 못내 아쉬워합니다.
그분들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마음과 발걸음은 무거웠습니다. 제가 처음 이곳 한국에 왔을 때 담당자를 통해 일주일만 교육 받으면 요양 보호사 자격증을 취득 한다는 정보를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만. 지금 생각해보면 조금은 쑥스러운 일지만 당시 이곳 경험이 없는 저로서는 그 자격증 자체가 무엇인지도 몰랐거든요.
하지만 결코 늦지 않았다고 생각해 봅니다. 이곳 한국 생활을 하면서 음식점과 극장, 공원에서 자주 보는 모습이지만 자녀들이 나이 많은 부모님을 모시고 있는 모습에서 가끔 고향 생각과 함께 부모님이 그리워 졌거든요.
이번 주간보호센터 실습 기간 내내 어르신들과의 시간을 보내면서 비록 부모님의 마지막 길을 바래 드리지 못한 불효자이지만 남북이 하나되면 내 고향 평양에 가서 요양보호센터를 만들고 내 고향 어르신들을 모셔 볼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서울에서 김춘애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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