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자유를 찾아 이곳 한국에 온 지도 벌써 13년이 되었습니다. 지난 주말 한국 생활 13년 기념으로 가족들과 함께 한 자리에 모여 앉아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한참 웃고 떠들며 식사를 하고 있는데 뜬금없이 작은딸이 우리가 한국에 온 지 벌써 미국식 나이로 13살이 됐고, 정말 세월이 이렇게 빨리 가는 것도 모르고 살았다고 하면서 기쁨과 함께 조금은 슬픈 마음이라고 합니다.
21살 나이에 여러 나라를 거쳐 인천 공항에 도착했었는데 벌써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애들과 씨름하며 살다 보니 세월이 가는 줄도 모르고 살았다고 합니다. 오늘도 엄마가 깨우쳐 주지 않았으면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 거라고 말합니다. 뭐가 슬프고 뭐가 기쁘냐고 물으니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말이 있듯이 당시 어린 나이에 말할 수 없고 표현할 수 없는 고생은 했지만 지금 우리 아이들이 자라는 모습을 보면 너무도 행복하다고 합니다.
딸의 얘기를 들으니 문득 지나간 세월과 시간들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스쳐 지나갑니다. 물살 빠르게 흐르는 두만강 물을 보는 순간 무섭고 두려웠지만 어린 딸의 손목을 꼭 잡고 사 품치는 차디찬 두만강 물에 발을 담갔고 물살에 떠내려가는 딸을 잡으려 허겁지겁 헤매던 그 순간 죽지 말고 꼭 살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꽁꽁 언 몸으로 칠흑같이 캄캄한 밤 작은 불빛을 찾아 헤매다가 나무뿌리에 찔려 피를 흘리며 더는 갈 수 없다고 주저앉는 딸아이의 귀뺨을 후려치며 계속 걸어야 한다고 다그치던 일.
다른 사람들은 첫 번 탈북기회에 성공하였다고 하는데 나는 세 번씩이나 체포되어 강제북송으로 두만강 물에 피 눈물을 뿌리던 일. 목숨을 걸었던 지난 탈북 과정과 비록 다른 사람들보다 세상물정에 대해 조금 늦게 눈을 떴지만 무조건 살아남아서 중국과 북한에 흩어져 있는 우리 아이들을 찾아서 한국으로 가야한다는 각오와 결심으로 버티던 세월이 주마등처럼 지나갔습니다. 갖은 고생 끝에 드디어 한국에 도착했던 전 과정이 한 눈에 안겨와 가슴이 짠해 오고 눈물이 나기도 했습니다.
안경을 벗어 닦고 있는데 5살짜리 손녀 딸애가 고사리 같은 작은 손으로 슬그머니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 주며 외할머니가 너무 보고 싶었다고 애교를 부리네요. 손자 4명이 와락 품으로 들어 왔습니다. 오늘은 외할머니가 제일 짱이네. 옆에서 지켜보던 할아버지의 지갑이 열렸습니다. 서울에서 새로 받은 아파트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아이들은 더운물 찬물이 콸콸 쏟아져 나오는 모습과 반짝반짝 빛이 나는 욕조를 보면서 천국이 따로 없다고 좋아하던 모습이 생각납니다.
밖에서는 칼바람이 몰아치고 함박눈이 펑펑 내리는 겨울에도 추운 줄 모르고 땀을 흘리며 반바지에 짧은 티셔츠에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살았고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는 장마철과 30도가 넘는 삼복 더위에도 더운 줄 모르고 살았습니다. 대중교통이 이렇게 발달되어 있는데도 발바닥에 털이 날 정도로 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니며 살고 있네요. 정말이지 북한에 있을 때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삶에서 자꾸 이런 얘기를 하게 됩니다.
만약 죽을 각오로 강을 넘어 이곳으로 오지 않았더라면 지금 나와 우리 가족은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20대 10대의 나이에 이곳에 온 우리 아이들이 이제 30대 중반이 되었습니다. 세상에 부럼 없다는 말의 참뜻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우리 아이들이기에 또 이런 고생이 있었기에 오늘의 행복한 삶의 빛이 남다른 것입니다.
'이제 우리 13살이네' 하는 내 말에 '정말 그러네' 하고 두 딸이 맞장구를 치는 바람에 우리 가족은 또 한 번 행복한 웃음을 짓게 됩니다. 13살이라 하면 작은 개울물에 떠내려가는 가랑잎을 보고도 좋아라 손뼉을 치며 한참 웃고 떠들 천진난만하고 순진한 나이입니다. 우리 가족은 잠시 13살 나이의 동심세계로 돌아갔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내가 노력하는 것만큼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는 행복이 있어 지금 이 모습 그대로 더도 말도 덜도 말고 한 십년만 살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바라면서 참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고 욕망 또한 끝이 없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서울에서 김춘애였습니다.
0:00 / 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