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성리 통일촌을 다녀와서

비무장지대(DMZ) 내 유일한 민간인 거주지역인 경기도 파주시 군내면 조산리 대성동 마을에서 6·25 전쟁 이전부터 살고 있는 김경래(오른쪽)씨와 박필선(왼쪽)씨가 통일촌에서 2㎞ 북쪽에 있는 대성동 마을을 가르키고 있다.
비무장지대(DMZ) 내 유일한 민간인 거주지역인 경기도 파주시 군내면 조산리 대성동 마을에서 6·25 전쟁 이전부터 살고 있는 김경래(오른쪽)씨와 박필선(왼쪽)씨가 통일촌에서 2㎞ 북쪽에 있는 대성동 마을을 가르키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0:00 / 0:00

얼마 전에 저는 통일을 준비하는 탈북인 연합회 회원님들과 함께 대성 마을을 다녀왔습니다. 판문점 관광을 한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이미 판문점에 여러 번 다녀온 경험이 있는 저로서는 왠지 며느리와 함께 북한이 가장 가까운 곳인 판문점에서 고향을 바라보며 향수를 달래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여 신청을 함께 했었는데 며늘애는 그만 승인이 거부됐습니다.

간호대학을 다니고 있는 며느리는 요즘 방학이거든요. 사실 승인 거부됐다는 사실을 전화로 들었을 때 사실 나 자신도 서운했었는데 함께 갈 수 없다는 얘기를 듣고 못내 아쉬워하는 며느리의 얼굴표정을 보는 순간 역시 혼자 가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습니다만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속담 그대로 내키지 않는 마음 그대로 친구들과 함께 전철을 타고 모임 장소로 갔습니다.

이미 모임 장소에는 여러 명의 회원들이 와 있었는데 그중에는 제가 이미 알고 있는 분들도 있어 서로 반갑게 인사도 나누었습니다. 통일 대교 검문소를 통과하는 시간이 지정되어 있어 즉시 출발했습니다. 어느덧 우리가 탄 자가용 승용차는 자유로에 들어섰고 얼마 안 가 통일전망대가 보였고 북한 땅이 바라 보였습니다.

임진강 하나 사이에 두고 남한과 북한은 서로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차이가 심했습니다. 우리 대한민국의 산들마다에는 푸른 숲으로 무성지어 있지만 북한산에는 벌거숭이 산 그대로 보였고 우리 대한민국에는 고급 아파트들이 줄지어 서 있지만 강 건너 쪽에는 시립카드 벽돌집들이 듬성듬성 서 있는 모습이 보였고 개성공단으로 들어가는 전기선들이 저 멀리 가지 늘어져 있었습니다.

이곳 한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는 분에게 저는 건너편 바라보이는 것이 북한 땅이라고 얘기하자 그분은 차 창밖으로 바라보며 고향 생각이 난다고 말하면서 어째서 남과 북이 한눈에 바라보여도 표시가 나는 가고 말했습니다.

북한은 전쟁이 끝난 지도 60년이 넘은 오늘에도 전쟁을 겪은 탓으로 산들이 벌거숭이라고 아직도 얘기하고 있다고 비록 본인이 나서 자란 고향이기는 하지만 너무도 부끄러운 곳에서 살아 온 것이 가슴 아프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얘기 저런 얘기하는 동안 차는 벌써 통일 대교에 들어섰고 헌병대 군인이 신분증을 요구했습니다.

통일대교에는 유엔 군인도 있었지만 늘씬한 키에 반듯한 헌병 옷을 입은 우리 대한민국 헌병군인을 보는 순간 비록 나이 많은 분들이었지만 속은 아직 20대 젊음의 착각인지 공주병인지 또 한 번 감탄했습니다. 그런데 통일대교를 건너자마자 대성마을에서 우리를 마중 나오셨다는 점잖은 두 분을 보는 순간 조금 의아해했습니다.

그때에야 회장님은 판문점 관광이 아니고 대성마을에 행사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몇 년 전에 이곳 마을 분들과 겨레화합 결연 가족공동체를 무었다고 하면서 해마다 이맘때이면 방문한다고 했습니다. 하여 저는 판문점은 여러 번 다녀왔었지만 DMZ 안에 있는 통일 촌마을 분들과는 처음 만남이어서 조금은 설레기도 했었고 또 조금은 긴장되기도 했었습니다.

평생교육법인연대 참 좋은 세상이 주체가 되어 진행하는 겨레 화합결연가족 만남의 날 행사가 시작됐습니다. 처음으로 우리는 진행자분의 지휘 하에 6•25전쟁의 노래를 합창으로 부르고 또 불렀습니다. 제가 한국에 와서 처음으로 불러 보는 노래였지만 정말 찡하게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곧이어서 대성마을 회장님의 연설이 있었습니다.

1978년에 대성동 통일촌에서 대구 학생들과의 첫 만남 행사가 있었고 그 계기로 대성동 주부들이 대구를 방문해 낙동강은 어머니로 하고, 임진강은 따님으로 결연을 맺고, 해마다 가을이면 한해 농사를 지은 쌀과 참깨를 비롯한 농산물을 따님들에게 전달하는 행사를 진행했다고 합니다.

그 이후 남북교류라는 의미로 또 한 핏줄 한겨레라는 의미로 우리 탈북민들과 결연을 맺고 몇 년째 이런 행사를 통해 만남을 이어 오고 있다고 합니다. 지난날에는 낙동강과 임진강을 이어주는 행사였다면 지금은 대동강의 자녀들까지 생겨 너무 반갑고 기쁘다고 합니다.

임진강의 따님들과 낙동강의 어머님들, 그리고 대동강의 자녀들, 강과 강으로 이어지는 겨레 화합의 가족 공동체 만남은 그야말로 의미있고 가장 뜻이 깊은 말이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대성동 따님들이라고 얘기는 하지만 대구에서 버스를 타고 몇 시간씩 걸려 고생하며 찾아온 낙동강의 어머님들과 꼭 같은 어르신들이었습니다.

임진강 따님들과 대구 어머님들, 그 어르신들은 직접 가지고 온 찰떡과 참외를 우리 탈북자들에게 어렵게 이곳까지 내려오신 귀중한 자녀들이라고 하면서 많이 먹으라고 권하기도 했고 시원한 음료수도 권했습니다. 그리고 직접 손으로 지은 흰쌀 한 포대씩 우리에게 주었습니다.

비록 단순하게 흰쌀 한 포대라고 하지만 너무도 깊은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배곯지 말고 다니거라, 어머니 쌀> 우리의 수많은 부모님들이 그 어려운 전쟁 시기 자식들에게 들려주던 그 마음 그대로였습니다. 그분들과 기념사진도 찍었습니다. 우리는 내년에 또다시 만나자는 굳은 약속을 뒤로 한 채 헤어져 서울로 올라 왔습니다.

통일을 준비하는 탈북자 연합회 회장님은 함께 방문하지 못한 분들도 서운해할 것이라고 하면서 그들을 헤아려 흰쌀 한 포대씩 나누어 주었습니다. 아침, 저녁 흰쌀로 밥을 지을 때마다 그리고 밥을 먹을 때마다 대성마을 어르신들과 대구의 어르신들의 은정깊은 사랑을 잊을 수 없습니다. 마치 고향에 두고 온 부모님들처럼 보고 싶고 그리운 그분들과 만나게 될 내년 이맘때를 그리면서 서울에서 김춘애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