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생각 평양생각] 벽지와 장판에 얽힌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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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 전에 임대주택 관리공단에서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그 분은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는 저에게 입주한지 7년이 됐기 때문에 장판과 벽지를 교체해 줄 거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벽지는 지난 해에 좋은 것으로 했기 때문에 장판만 교체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지난 토요일 오전으로 약속을 했고, 장판 색깔은 저의 집 벽지가 은색이어서 나무 색깔이 좋을 것 같아 진한 갈색으로 골랐습니다.

지난 주말 아침 일찍 일어난 저는 엄마가 고생한다면서 조금 안쓰러워하는 아들을 출근시키고 짐을 정리하려고 했지만, 제가 할 일은 별로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사 짐을 운반하는 사람들을 쓰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아침 8시30분이 되자 드디어 이사 짐을 운반하는 사람들이 왔습니다. 그런데 단 2명이어서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2명이 어떻게 저 많은 짐들을 옮길까 걱정했는데 30분도 안돼 벌써 집안의 모든 물건들을 복도로 내놓았습니다. 그리고는 장판을 교체하는 사람들이 30분도 안되어 우리집 장판을 다시 깔아줬습니다.

일꾼들이 간 뒤에 혼자 집안 청소를 하는데 맏딸한테서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딸은 엄마가 고생하는 게 마음 쓰인다면서 청소하는 사람을 부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웃으면서 일꾼들이 와서 정리해 주고 간 뒤라 별로 할 일도 없고, 그저 간단한 물걸레 청소만 하면 되는데 무슨 사람을 쓰느냐고 했더니 딸이 하는 말이 '이럴 때 우리 엄마 호강 한번 해 보는 것도 좋지 않으냐'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엄마 사랑이 지극한 딸의 마음이 어찌나 고맙던지 하루종일 기분이 좋았습니다.

딸 전화를 받고 나서 새로 교체한 장판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모든 게 부족했던 북한에서의 생활이 떠올랐습니다. 내 고향 북한에서는 장판지를 구입하기가 어려워 시멘트 종이에 콩물로 색깔을 들이고 니스로 반들반들하게 칠해야 하는데 그나마도 부족해서 종이를 조각조각 덧붙히고, 그 위에 니스를 바르고 또 발라 장판이 마치 색동저고리 처럼 얼룩덜룩했습니다. 벽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덕지덕지 바른 벽지와 장판은 색깔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낡아도 여간해서 교체하기가 힘들었습니다. 당국은 1989년 세계학생청년 축전 때 벽지와 장판을 공급을 해주고는 10년이 지나도록 한번도 공급해 주지 않았습니다.

제겐 또 벽지에 얽힌 마음 아픈 기억도 있습니다. 겨우 한글을 알기 시작했던 우리 아이들이 벽지에다 연필로 어머니와 아버지 이름을 쓴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 모습을 보고 회초리를 손에 들고 아이들에게 종아리를 걷어 올리라고 호령을 했습니다. 해마다 4월이면 위생검열을 나오는데 벽지에 낙서가 돼 있는 것을 보면 강한 비판을 받기 때문입니다. 세 아이들은 화난 제 모습을 보고 겁에 질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지우개를 들고 지우고 또 지웠습니다. 그 때 큰 아이가 제게 장롱 속에 숨겨 놓은 벽지를 바르면 안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제 마음은 아팠습니다. 벽지를 교체한 지 몇 년이 지났던 때였는데 사실 그 때 저는 예비로 가지고 있던 벽지와 장판지가 있었습니다. 저는 그 동안 잘 보관해 뒀던 벽지와 장판지를 농촌에 가서 식량으로 바꾸어 오려고 했었습니다. 하지만, 끝내 탈북하기 전까지 저는 그 벽지와 장판지를 교체하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들은 얘기로는 제가 큰딸을 찾아 먼저 탈북한 뒤 남편이 그 장판지와 벽지를 시장에서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데 보탬이 됐다고 합니다.

남한에 온 우리 탈북자들은 평양의 광복거리와 통일거리에 있는 아파트 보다 더 시설이 좋은 아파트를 정부로부터 받아 북쪽의 상류층이 누리는 생활 못지않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주위의 탈북자 친구들도 출근해서 한마디씩 합니다. 정말 이곳 남한에서의 삶은 북한에서의 상상도 하지 못했던 새 삶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대한민국 정부와 국민들에 대한 고마움을을 항상 잊지 말고 살아야 한다고도 자주 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