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이었습니다. 마침 복날이라 시골 개장국 집을 다녀왔습니다. 개장국이라는 단어는 북한에서 사용하는 단어이고 이곳 남한에서는 흔히 보신탕이라고 하죠. 개장국이라는 단어는 저도 남한에서 이번에 처음 들어봤습니다. 같이 간 북한 친구들도 남한에선 익숙한 단어가 아니기에 깜짝 놀랐습니다. 그 식당은 말이 시골이지 워낙 입소문이 난 음식점이라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순서가 되어 자리에 앉았습니다. 전골을 시켰습니다. 국물을 숟가락에 떠서 입에 가져가는 순간 개장국 맛 역시 내 고향에서 자주 먹던 그 맛이었습니다. 이곳 남한 사람들은 보신탕에 들깨 잎, 부추와 대파를 많이 넣어 끓이지만 내 고향에서는 개고기를 푹 삶아 손으로 고기를 뜯어 양념에 무쳐 얼큰한 국물에 노란 조밥을 먹거든요.
시골 개장국 역시 들깻잎과 대파 그리고 부추를 조금 넣었지만도 국물 맛이 역시 내 고향 맛이 났습니다. 한참 밥을 먹던 친구들이 고향 생각이 난다고 하네요. 평남도가 고향인 친구는 어머님이 몸이 허약한 사위를 위해 해마다 겨울이 되면 개 엿을 만들어 주었다고 합니다. 장모의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도 언제 한 번 남편은 장모님을 위해 나무 한 번 해드리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곳 충청도가 고향인 친구는 어렸을 적에 부모님을 도와 벼농사를 지었는데 보리 고개에는 반드시 식량이 떨어져 많은 배를 곯았다고 하면서 더위에 땀을 많이 흘리는 여름 복날이 오면 꼭 부모님과 함께 보신탕을 많이 즐겨 먹었다고 합니다. 하기에 지금 60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복날이 오면 꼭 90이 되신 어머님을 모시고 보신탕집을 찾곤 한다고 합니다.
이런 저런 친구들의 얘기를 들으며 지나간 고향에서의 수많은 기억들이 스쳐지나 가네요. 어린 시절 아버님 생일에 큰 개 한 마리를 잡아 하루 종일 무쇠 가마 앞에서 땀을 흘리며 아버님 친구들에게 대접하시던 어머님 생각이 났습니다. 작은 병아리 한 마리 무서워 잡지 못하는 아버님을 대신해 개 잡는 일은 항상 어머님이 하셨거든요. 때로는 오리와 닭 그리고 게사니를 키워 더운 여름철 삼복더위에 아버님의 건강을 위해 보양식인 황기와 찹쌀 그리고 대추를 넣어 닭곰과 오리곰, 토끼곰을 만들어 드렸습니다. 하기에 철없던 어린 나이인 제가 보기에도 어머님은 대단하시다는 것을 알게 됐었지요.
5,6월에는 발잔등에 떨어진 개 고깃국 물도 혀로 핥아 먹는다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귀하고 영양가가 좋다고 하는 말인 듯합니다.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평양시에서는 닭이든 토끼든 모든 짐승은 위생 사업과 관련하여 키울 수가 없거든요. 남모르게 저에게 새끼 강아지 한 마리가 생겼습니다. 마침 10월 달이라 저는 부엌 바닥 마루 밑에 넣어 두고 키웠습니다. 다음해 4월 중순이 되어 아이들 모르게 남편과 4촌 시동생이 함께 개장국을 끓었거든요.
저녁식사를 준비 하고 있는데 마침 학교에서 돌아온 아들 녀석이 부엌 바닥 널판자를 열고 들여다보면서 강아지를 찾았습니다. 그 사건이 있은 이후로 우리 애들은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개고기를 먹지 않네요. 비록 작년에 돌아가셨지만 살아생전에 북한에 계셨던 형부는 뇌출혈로 인해 오른팔과 오른 다리를 절면서도 지팡이를 들고 건강에 좋은 보양식을 찾아 평양시에 이름 있고 오랜 역사가 있는 선교구역 '남신단고기국집'을 자주 찾았다고 합니다.
점심을 맛있게 먹고 커피 한 잔 하면서 나이 많으신 식당 사장님과 몇 마디 나누게 됐습니다. 고향이 평양 강동이라고 합니다. 1·4후퇴 때 이곳 남한으로 오신 실향민이었습니다. 아들 며느리에게 맡기고 사장님은 그냥 심심하여 봐주고 있다고 하네요. 음식점 옆에 걸려 있는 큰 무쇠 가마 4개를 저희에게 보여 줍니다.
펄펄 끓고 있는 무쇠 가마에서는 구수한 개장국 냄새가 나고 아궁이에서는 참나무 장작이 활활 타고 있었습니다. 무쇠 가마가 걸려 있는 아궁이만을 보아도 흘러간 지난 세월을 알 수가 있네요. 여느 때 없이 찜통더위가 계속 되어 더위로 지치는 여름철 남과 북 친구들과 함께 시골 개장국을 먹으며 지나온 고향에서의 추억을 해 보았습니다. 서울에서 김춘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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