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과 북의 치과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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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무더운 여름이 거의 끝자락에 다다랐나 보네요. 입춘이 지나고 말복이 지나자 제법 아침저녁은 선선합니다. 더운 찜통더위를 피해 나름대로의 즐겁고 행복한 여름휴가도 어느덧 마감고비 입니다만 아직 시원한 가을을 저만치 둔 채 한낮에는 절정에 오른 무더위가 짜증이 날 지경이네요.

치과 치료를 마치고 더위를 피해 전철역 근방에 있는 시원한 그늘 정자에 앉았습니다. 옆에는 분수가 서로 높이를 자랑하듯 시원하게 물을 뿜어 오르네요. 마치 흰 구름이 뭉게뭉게 하늘 높이 떠 있는 모습을 보는 설레는 마음 그림의 한 장면 같았습니다. 갑자기 마취가 풀리면서 잇몸 통증이 났습니다. 금방 나온 치과를 다시 찾아 원장님과 상담을 마치고 통증을 멈추는 약을 처방받았거든요.

약을 먹으니 언제 아팠냐는 듯이 금방 멈추었습니다. 전철을 타고 집으로 오면서 언뜻 언뜻 지나가는 차창 넘어 바라보며 지나간 가슴 아팠던 기억이 생각났습니다. 강제 북송되어 무산군 보위부에서 개도 안 먹는 돈을 먹었다고 받았던 고문에 앞니가 2개 부러졌습니다.

순간 많은 피를 흘렸지만 보위부 담당 지도원은 아랑곳 하지 않고 조국을 배반한 배반자취급이었습니다. 오랜 기간 부러진 치아 통증으로 잠을 설쳤습니다. 평양으로 이송 도중 도망쳐 친척 집에 머무르면서 치과 병원을 찾았습니다. 치과 의사는 치료가 먼저가 아니라 내 손에 어떤 좋은 물건을 가져 왔는가 부터 진찰 하더니 하루 배정 받은 약이 없다고 단호하게 거부했습니다.

그때에 이미 무상치료제는 사라지고 썩고 병든 사회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 그 때 돈이 없으면 치료도 받을 수 없고 죽어야만하는 이곳이 바로 내 고향 북한이라는 생각에 바로 이곳 한국으로 오게 된 결심을 하게 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해 봅니다.

인간이하의 짐승보다도 못한 고문을 받으며 눈이 번쩍 뜨이게 되었고 그 계기로 내 가족과 함께 이곳 한국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이곳 한국에 도착해 하나원에서 제일 처음으로 부러지고 병든 치아 치료와 함께 예쁜 치아를 새로했습니다. 10년이 지난 오늘날 저는 그 치아를 다시 교체하고 치료 하는데 5개월이 걸렸습니다.

오랜 시간 치과 치료를 받으면서 내 가족처럼 친절하고 따뜻하게 대해주시는 원장님의 모습에서 지나간 추억을 해보지 않을 수가 없었거든요. 내 고향 평양의 치과의사 같으면 본인이 통증이 심하다고 뽑아 달라고 하면 본인 의사대로 그냥 뽑아 주는 것으로 끝이거든요. 뽑은 자리에 새 이빨을 한다는 것은 의사의 진단과 결심이 아니라 본인이 알아서 해야합니다.

하지만 이곳 원장님은 될 수록이면 본인의 이빨을 살리는 것이 중요하고 뽑아야 하는 이빨은 왜 뽑아야 하고 또 어떤 이는 신경치료를 해야하지만 또 어떤 이는 왜 신경 치료를 하면 안 된다는 설명을 세심하게 해 가면서 치료를 하다 보니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통증을 참지 못해 뽑아 달라는 본인의 생각대로 쉽게 뽑아 주고 사람 중심, 인간의 생명이 먼저가 아니라 환자의 손에 든 뇌물을 먼저 보고 진단과 처방을 내리는 북한 치과의사와 사람의 건강을 먼저 생각하고 장래를 생각해 하나하나 세심하게 치료해주는 이곳 남한의 의사를 비교해 보면서 너무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치아 통증 하면 또한 잊을 수없는 사연이 있네요. 군복무 시절이었습니다. 밤새 치아 통증으로 신문지를 태워 통증이 심한 치아 사이에 연기를 쐬었고 심지어는 남자들이 피우는 담배를 구입해 피웠지만 통증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다음날 퉁퉁 부은 볼을 부여 않고 사회 병원을 찾아 뽑았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조금 우스꽝스러운 일이지만 군복을 벗은 후에도 치아 통증으로 놋 오강에 오줌을 끓여 넣었던 기억도 있네요. 이제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떳떳하고 당당하게 흰 이를 드러 내놓고 활짝 웃으며 내가 제일 좋아 하는 맛있는 갈비를 뜯어도 되네요. 서울에서 김춘애입니다.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