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에 저는 텔레비전 뉴스에서 가슴 아픈 장면을 보게 됐습니다. 한창 예쁠 나이인 23살의 처녀라고 하는데 겨우 12살쯤 되어 보이는 모습으로 강냉이 밭에서 주머니를 한 손에 들고 풀을 뜯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그 모습도 측은한데 하루 종일 풀을 뜯어 장마당에 내다 팔아야 빵 한 개 값도 안된다는 말을 듣는 순간 제 마음은 더욱 아팠습니다. 북한 돈 500원을 까맣고 작은 손으로 받으며 어쩔 줄 몰라 당황해 하는 그의 천진한 모습을 보는 순간,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나왔습니다.
인터넷 기사에서는 이런 글도 보았습니다. 고원 역에서 한 꽃제비 아이가 기차바퀴 밑에 깔리는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평양 금골행 기차가 고원 역에서 한동안 정차했다가 막 출발하려고 하는 순간, 열린 창가에 앉아 있던 한 승객이 식사를 놔둔 채 한눈을 팔고 있는 것을 어린 꽃제비가 잽싸게 가로채 도망쳐 나가다가 그만 겉옷이 객차 걸쇠에 걸렸는데 기차바퀴가 구르기 시작한 뒤라 그 아이는 그만 바퀴에 깔리고 말았습니다. 사고 신호를 받은 기차가 곧 멈춰서기는 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고 했습니다. 철도역 노동자들이 아이를 꺼내 일단 대합실로 옮겼지만, 병원으로 데려가기 전에 고통스러워하다가 과다출혈로 결국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관련 기사는 중학교 1학년쯤 돼 보이는 아이가 너무 배고파 식사를 훔치다 비참하게 죽은 것을 두고 모두 혀를 끌끌 차며 안타까워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요즘 북한에는 가는 곳마다 작년 말에 비해 꽃제비 구제소 인원이 3배 증가하고 있다고 합니다. 새로 늘어나는 꽃제비들 중엔 30세에서 50대 중반까지 어른 꽃제비도 있지만, 대다수가 유치원이나 인민학교 중학생을 포함한 어린이들이라고 합니다.
꽃제비들에 대한 이야기는 지난날 제 아들이 실제로 겪은 일이기 때문에 저는 눈물 없이 들을 수도, 읽을 수도 없습니다. 더우기 지금 50살이 훨씬 넘은 제가 만약 북한에 있다면 굶어 죽었거나, 살아 있더라도 어느 골목길 작은 메뚜기 시장에 쭈그리고 앉아 생존을 위해 싸우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 참혹한 북한 현실에 마음이 아프고 쓰립니다.
90년대 중반 한창 북한이 고난의 행군을 하던 매우 어려운 시기에 저는 어린 아들을 고향에 두고 탈북을 했습니다. 당시 12살이었던 어린 아들도 평양역이나 간리역, 만경대 유희장이나 대성산 유희장을 전전하면서 길거리에 떨어진 음식찌꺼기를 주워 먹었고 그것도 모자라 남의 것을 덮쳐 먹거나 훔쳐 먹었다고 합니다.
달리는 기차를 타고 함흥역과 혜산역, 그리고 통제가 심한 라진, 선봉을 비롯해 안 가본 곳 없이 기차를 타고 다녔다고 합니다. 갈 곳 없는 꽃제비들이 기차역 대합실을 찾는 것은 여행객이 많이 몰리기 때문에 빌어먹기가 다른 곳보다는 쉽고, 훔쳐 먹기도 쉽기 때문입니다. 평양 간리역이나 신성천역, 고원역과 같은 곳은 기차를 갈아타는 크고 복잡한 역이라 다른 곳보다 사람들이 더 많이 모입니다. 기차역은 추운 겨울에는 많은 사람들의 온기로 추위가 덜하여 잠시나마 잠을 잘 수가 있어서 꽃제비들이 자주 가는 곳입니다.
북한은 과거에 역 대합실 꽃제비들에 대한 단속이 심했지만, 보통 일주일이나 열흘 동안의 기차 여행에 지친 수많은 사람들이 꽃제비와 같은 누추한 모습이어서 누가 꽃제비이고 누가 여행객인지 분간하기가 어려워 단속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같은 하늘 아래 살고 있는 민족인데도 남한은 식량이 남아도는 게 고민일 정도로 나날이 발전해 세계 선진 국가에 다가서고 있지만, 북한은 90년 중반의 고난의 행군시기에나 1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하나도 변한 것 없이 주민들이 굶주림과 폭정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올 여름 큰물피해 때문에 북한에서는 살 집을 잃고, 먹을 것, 입을 것도 모두 물에 떠내려가는 바람에 어른, 아이, 노인 할 것 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집 없는 꽃제비 신세가 돼서 한지에 나앉게 됐다고 합니다.
이곳 남한에서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추워도 추운 줄 모르고, 더워도 크게 더운 줄을 모르고 사시사철 먹을 걱정, 입을 걱정, 땔 걱정, 쓰고 살 걱정이 없이 사는 저는 고향에 대한 소식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아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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