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생각 평양생각] 세탁기와 인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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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저는 탈북자동지회에서 진행하는 수기 공모전에 참가해 세탁기를 상으로 받았습니다. 집에는 이미 사용하는 세탁기가 있어서 세탁기를 가지고 온 기사 아저씨에게 저는 그냥 방에 들여놓아 달라고 했습니다. 아이들은 '우리 엄마가 수기 공모전에서 상으로 받아 온 세탁기라 의미가 있다'고 자랑도 하지만 사실 저는 덩그러니 한 방을 차지하고 있는 세탁기를 볼 때마다 가슴 아팠던 기억으로 마음이 심란해 지곤 합니다.

처음 탈북자 동지회 게시판에서 수기 공모전이 있다는 안내를 보고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공모전에 글을 내볼까 했지만 글을 많이 써보지 못했기에 자신이 없었습니다. 문학적 소질은 둘째 치고 말 주변이 워낙 없는 저로서는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망설이는 저에게 함께 근무하는 친구가 이런 말을 해줬습니다. 본인이 실지 체험한 내용을 쓰면 되는데 무슨 응변이 필요한가고 말입니다.

용기를 얻은 저는 회사에서 퇴근해 컴퓨터와 마주 앉았습니다. 어떤 주제를 잡을 것인가 고민하던 중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저는 나름대로 북한에서 반생을 살아오면서 11년제 의무 교육을 받았고 또 군복무 생활을 마치고 평양시 수산물 종합 상점과 평양시 인민반장을 하면서 그래도 나름대로 사회생활을 건전하게 잘 해왔다고 할 수 있었지만 북에서 살 때는 '인권'이란 두 글자를 들어 본 적도 없고 또 제 입으로 말을 해 본 적도, 공책에 써 본 적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중국에서 강제 북송돼 북한 보위부와 안전부 그리고 단련대와 집결소에서 마구 짓밟혔던 굴욕과 짐승보다도 못하게 취급당하던 그 수치와 모욕감이 제 머리를 번개처럼 지나갔습니다. 중국에서 작은 딸과 함께 양 손에 쇠고랑을 차고 함북도 무산군 보위부로 강제 북송돼 갔습니다. 당시 보위부에서는 탈북자들에게 네 가지의 조사를 했습니다.

첫째, 남조선으로 가기 위해 두만강을 건너 탈북했는가, 둘째, 중국에서 남조선 사람을 만나 무슨 도움을 받았는가, 셋째, 중국에서 기독교에 들어가 성경학습을 받았는가, 넷째, 정말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탈북을 했는가... 이 네 가지 조사 항목 중에 첫째와 둘째 그리고 세 번째에 해당되는 탈북자들은 시범에 걸어 공개 총살도 진행하고 정치범 수용소로 데려갔습니다.

공개 총살 장소로 또는 한번 들어가면 죽어서도 나올 수 없는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가면서도 왜 내가 공개 총살을 당해야 하며 왜 수용소로 가야 하는지 누구에게 하소연 한번 못하고 조국과 나라를 배반했으니 응당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북한 주민들이었고 우리 탈북자들이었습니다.

이런 조사를 마치고는 옷을 무조건 벗겼습니다. 저는 어린 딸 앞이라 조금 봐달라고 애원 했지만 그들에게는 통하지 않았습니다. 실오리 하나 걸치지 않은 채 양 손을 앞으로 들고 앉았다 일어섰다를 반복하는 소위 '뽐프 고문'을 하고 또 허리를 구부려서 항문을 조사당하면서 이미 우리는 인간이 아니구나 하는 모욕감을 느꼈습니다.

세상에 태어난 지 100일도 안 된 이제 겨우 2개월 된 갓난아기도 있었습니다. 아기 엄마가 우리와 함께 이런 고문을 당하는 동안 아기는 책상에 누워 엄마의 배 속에서 웃던 그 모습으로 눈웃음을 지으며 쌕쌕 자고 있었습니다. 무산군 보위부 종합 지도원이라는 자가 들어와 중국의 한족 씨를 받아 가지고 왔다면서 옆구리에 끼고 들어온 두꺼운 책으로 아기의 얼굴을 '탕' 하고 내리쳤습니다.

순간 아기는 얼굴이 까맣게 질려 숨도 못 쉬고 자식을 둔 엄마들인 우리는 그저 악 악 소리만을 질렀습니다. 까무러친 아기를 안고 하염없이 울고 있는 아기 엄마의 모습을 보면서 보위부 종합 지도원은 눈썹 하나 까딱 하지 않고 밖으로 휙 나가 버렸습니다. 저는 조선 사람으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 그때 처음 후회했습니다.

제 인생에 처음으로 짐승보도 못한 굴욕과 모욕, 수치감 속에서 저는 무조건 이곳을 탈출해 이산가족이 아닌 이산가족이 되어 중국과 북한에 흩어져 있는 내 가족을 찾아 남한으로 가야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두 번째 북송 당했을 때는 개도 안 먹는 돈을 먹었다고 주먹으로 제 얼굴을 때려 두 개의 치아와 함께 빨간 선지피가 입에서 쏟아져 나왔습니다.

어린 시절 학교에서 글짓기나 몇 번 써 보았고 당 생활 총화를 써 본 경험밖에 없는 저였지만 할 얘기가 있었기에 공모전에 글을 냈고 이렇게 상으로 세탁기까지 받을 수 있었습니다. 비록 작은 것일 지라도 저는 고마운 마음을 금치 못합니다.

제가 대한민국에 온 첫 날부터 시민 단체들이나 국민들이 북한 주민들의 인권과 자유를 위해 활동한다는 말을 들어왔습니다. 10년이란 세월이 흐른 오늘에도 인권이란 말뜻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지만 내 개인의 권리가 사회적으로 보장받을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는 것은 깨달았습니다.

북한에는 정치범 수용소를 비롯한 수많은 수용소가 있고 그 속에서 인권이라는 말조차 모르고 많은 사람들이 짐승처럼 죽어가고 있습니다. 또 인권과 자유와 권리를 마구 짓밟히고 있습니다. 배고픔을 참지 못해 농장의 풋 강냉이 한 이삭을 훔쳐 먹었다고 공개 총살 사형장에 서야 하는 북한 주민들도 인권의 뜻을 알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