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생각 평양생각] 고향 언니에게서 받은 사진

2009년 9월 2차 추석 이산가족 상봉 둘째날인 30일 금강산 호텔에서 중식만남이 열렸다. 팔순 생신을 맞는 북측 최병욱 할아버지가 남측 동생 최병오씨 가족의 축하를 받고 있다.
2009년 9월 2차 추석 이산가족 상봉 둘째날인 30일 금강산 호텔에서 중식만남이 열렸다. 팔순 생신을 맞는 북측 최병욱 할아버지가 남측 동생 최병오씨 가족의 축하를 받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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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 고향에 있는 언니로부터 한 장의 사진을 받았습니다. 아저씨라고 불렀던 형부와 함께 찍은 환갑 사진이었습니다. 사진을 받아 본 그날 저는 꼬박 밤을 뜬 눈으로 보냈습니다. 너무도 많이 몰라보게 변해 버린 아저씨, 환갑이 조금 지난 나이건만 뇌출혈로 인해 언어 장애로 고생을 하고 있는 형부에게 환갑상을 해줘야지만 조금 더 오래 살 수 있다는 언니는 아들 결혼식 상차림 앞에서 환갑 사진을 먼저 찍었다고 합니다.

환갑 사진은 제가 생각하고 있었던 그대로 검소하기도 했지만 북한 사람들 생활환경에서는 꽤 나름대로 괜찮아 보이는 화려한 상이었습니다. 바나나도 있었고, 물고기도 2마리나 올려놓았고, 수박과 떡도 있었는데 제일 눈에 들어오는 것은 빨간 꽃이었습니다.

옛날부터 평양 시민들은 최대한 검소하게 해야 한다는 당의 방침에 따라 결혼식에는 과질(약과)은 물론이고 무로 꽃을 만들어 빨간 물감을 들여 환갑상이나 결혼식상에 화려하게 올려놓는 것이 관습으로 전해오고 있습니다.

아마도 제 생각에는 그 무꽃으로 생각됩니다만 환갑상이든 결혼식 상이든 저에게는 그것이 별로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알아볼 수 없게 너무도 많이 변해 버린 형부의 모습과 언니의 모습이었습니다. 사진 속 모습은 머리를 검은 물감을 들여 흰 머리는 별로 없어 보였지만 너무도 늙어 버린 언니와 형부의 모습을 보는 순간 저는 너무도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지난해 10월에 15년 만에 언니와 첫 전화 통화를 한 적이 있었고 그 이후 언니의 사진을 받아 보았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이번에 고향에서 날아온 사진을 보면서 내가 정든 고향과 사랑하는 부모형제들과 생리별 후 너무도 오랜 세월이 흘렀구나 하는 생각이 와 닿았습니다.

형부 나이는 이제 66세. 이곳 대한민국 같으면 60대는 청춘이라며 행복하고 즐거운 세월을 보낼 한창 나이건만 길에서 마주치면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해 버린 형부의 모습이 자꾸만 눈에 삼삼합니다. 내가 고향을 떠나기 전 형부는 단 한마디 '처제 밥은 먹었어?'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리 무뚝뚝한 사람인 형부가 지금은 이 처제 말을 자주 하곤 한다고 합니다. 어디에 가 있는지, 아프지 않고 건강한 몸으로 잘 있는지, 조카들도 이젠 성인이 되어 결혼도 했고 애기도 두었을 것이고 처제도 할머니가 됐을 텐데, 죽기 전에 만나 볼 수 있을까, 언제면 나는 큰 할아버지란 말을 들을 수 있을까, 한번 뇌출혈로 인해 정확한 발음으로 잘은 하지 못하지만 이말 만은 또박또박 힘주어 한다고 합니다.

15년 전 제가 큰 딸을 찾아 국경으로 떠날 때 형부는 청진 역까지 데려다 주면서도 마음이 놓이지 않은 듯 꼭 좋은 소식을 가지고 며칠 뒤에 이 자리에서 만나자고 했었습니다. 그리고는 지금도 청진 역에 갈 때마다 혹 제가 기다릴 수 있을지 모른다고 언제나 찾아 헤매곤 했었고, 승무 교대를 하게 되면 친구에게 나를 찾는 여자 분이 있으면 꼭 태워 평양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 있게 도와 달라는 부탁을 빼놓지 않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 말을 들었을 때 제 가슴속에서 뭔가 쿵 하고 큰 덩어리로 가슴이 확 막혀 숨을 쉴 수가 없었습니다. 워낙 형부도 우리 부모님처럼 좋은 가정환경 속에서 자랐지만 총각 시절 대학을 졸업하고 철도성에 배치 받아 한 곳에서 같은 직업으로 평생을 살아온 형부였고 1년, 12달, 365일 자기 업무에만 충실해 수많은 표창장과 상을 받으며 당에 충실한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매일 저녁이면 단파 라디오로 우리 대한민국 소식을 자주 듣기도 하고 대한민국 드라마도 자주 시청한다고 합니다.

드라마의 장면들을 통해 발전된 대한민국의 모습과 국민들의 행복한 생활 모습을 보면서 여기 대한민국으로 오는 꿈을 꾸기도 한다고 합니다. 살아생전에 형부를 다시 볼 수 있을지가 걱정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지난 번 전화 통화에서 이모의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마음이 아팠건만 이제는 사진을 보고도 알아 볼 수 없게 됐다고 하는 아이들의 말을 들었을 때 저는 과연 통일이 될 수 있을까, 과연 그날은 언제일까, 제 꿈은 항상 사랑하는 형제들과 함께 자가용 승용차를 타고 평양에서 서울까지 여행하는 것이 꿈이었는데 과연 그 꿈을 이룰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고향을 지척에 두고도 갈 수 없는 서울에서 자가용 승용차를 타면 2시간이면 얼마든지 갈 수 있는 거리건만 자유롭게 갈 수 없는 고향, 이 짧은 거리이건만 어렵게 전화 통화 한 번이라도 목소리를 듣고 싶어 수십만 리를 걸어 두만강 국경 연선까지 목숨을 걸고 가야하고 서로 사진 한 장을 교환하기 위해서도 중국을 통해 목숨을 걸어야 하는 비극, 언제면 이 비극을 깰 수 있을지, 그날이 그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