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생각 평양생각] 15년 만에 언니한테 걸려온 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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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모임을 마치고 버스를 타고 집으로 오는 길, 한통의 국제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처음에는 전혀 모르는 목소리여서 저는 '누군 신지요' 라고 여러 번 되물으며 지금 한창 남쪽에서 유행하는 사기 전화가 아닌가 의심했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전화 속 목소리는 15년 전에 평양에서 헤어진 언니였습니다. 언니는 벌써 환갑이 지났다고 했습니다.

사실 요즘 남한에서는 수명이 늘어나서 환갑은 하지 않건만 북한에서는 자식들이 환갑잔치를 해주지 않으면 불효자식이라 합니다. 손전화기를 들고 우리는 서로 울었습니다. 그야말로 영화나 연속극에서나 나올 법한 일이었습니다. 저도 언니도 그저 그냥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고 전화기에서 울리는 우리의 울음소리로 남과 북이 하나가 되고 한강과 대동강 물이 한곳에 모이는 듯했습니다.

기쁨과 설움이 북받쳐 올라 할 말을 잃은 저는 다시 전화를 하겠다고 시간을 약속한 뒤 전화기를 끊었습니다. 결국, 15년만의 전화 통화는 20분 만에 눈물바다로 끝났습니다. 전화는 끊어졌지만 저의 눈에서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습니다.

저는 베란다에 나가 평양 쪽 하늘을 바라보며 어머니, 아버지를 불러 보았고 언니를 부르며 울고 또 울었습니다. 하루하루 세월이 가고 한 살 두 살 자꾸만 나이가 들면서 고향 생각이 자주 나고 이 세상에 계시지 않지만 부모님 생각이 자꾸 납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지난 어린 시절의 추억과 고향 생각으로 잠을 설칠 때가 한두 번이 아닌 요즘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그러하겠지만 지난 시절 동생들과 전화 연결을 했을 때와는 또 전혀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다음 날, 저는 약속된 시간에 언니에게 전화 연결을 했습니다. 언니 역시 약속된 시간을 기다리며 잠을 설쳤다고 합니다. 흐르는 눈물을 애써 참고 참으며 궁금했던 고향 소식과 부모님 소식, 동생들의 소식을 묻고 또 물었지만 그런 동안에도 저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 말문이 막혀 꺽꺽거렸습니다.

제가 언니에게 아침식사는 했는가, 뭐 맛있는 거 먹었는가 물었습니다. 낯익은 고향 말소리로 이밥에 호박장 그리고 가지 채를 먹었다고 했습니다. 저는 오랜만에 고향 말을 들으니 반갑고 좋다고 웃었습니다. 그제야 언니의 웃음소리도 들렸습니다. 그러나 뜻하지 않는 충격적인 말에 저는 놀랐습니다.

군에 입대해 여군생활을 하던 조카딸이 그만 병에 걸려 치료를 받기 위해 집에 와 있다고 했습니다. 기생충 벌레가 혈관에 생겨 피를 따라 움직인다는 병이었습니다. 왜 그런 병이 걸리게 됐는가 물어 보았더니 잘 익지 않은 고기를 먹어 그런 병에 걸렸다고 하면서 언니는 절대로 잘 익지 않은 고기와 불고기는 먹지 말라고 저에게 간곡히 부탁을 했습니다.

저는 그 말에 이곳에서는 돼지나 소 그리고 모든 짐승들에게도 검증된 사료를 먹이기 때문에 그런 병이 걸릴 확률이 거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동생들이 이곳 대한민국에 오고 싶어 하는 희망을 잃지 않고 있다는 언니의 말에 제 생각을 얘기했습니다.

지금 북한에서 김정은이 후계자로 정해진 뒤 탈북자들을 막기 위해 갖은 만행을 다 하고 있으니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한다고 하자 언니는 그런 말은 더 이상 하지 말자고 제 말을 막았습니다. 이런 언니의 말을 들으며 '이런 것이 없으면 북한 땅이 아니지' 했지만 저의 마음은 무척 아팠습니다.

자식을 찾아 국경으로 떠나는 이 동생과 한 잔의 이별 술로 헤어진 지 15년 만에 상봉도 아닌 겨우 전화로 목소리를 듣는데 하고 싶은 말도 제대로 자유롭게 표현도 못하고 통제된 언어만 사용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남쪽의 동생과 북쪽의 언니... 한 부모를 두고 자란 한 형제, 한마음 한뜻을 가진 형제이건만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고 전화로도 하고 싶은 말도 제대로 못하는 현실이 너무나 마음이 쓰렸습니다.

언니는 제 아들의 상처를 수술해 줬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미국과 이곳 한국 교회의 지원을 받아 수술하기로 했었지만 아들이 거부해 성형수술을 받지 않았다고 얘기했습니다. 그렇지만 여기엔 상처를 없애는 약도 있어서 걱정이 없고 상처로 인해 생활에서는 불편이 안 된다고 얘기해줬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미국도 세 번이나 초청을 받아 갔다 왔고 일본에도 다녀왔다고 자랑을 했습니다. 미국이나 일본도 살기 좋은 나라이지만 저는 지금 제가 살고 있는 서울이 더 좋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빠른 시일에 언니와 함께 우리가 가보고 싶은 다른 나라들을 구경하면서 지난 추억들을 글로 써보자고 했습니다.

지금 저는 맏이와 둘째도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고 있고 큰애는 딸애를 낳았는데 지금 5살이고 둘째는 이제 22개월 된 아들이 있다고 소식을 전했습니다. 이곳 대한민국에 올 때에는 비록 4명이 왔지만 이제는 식구도 8명으로 늘어 부자가 됐다고 자랑을 하면서 아들 역시 직장을 열심히 다니고 있어 걱정거리가 없다고 했습니다.

언니는 네가 고생한 걸 언니도 잘 알고 있다면서 지금 행복한 복을 누리고 있다니 부럽다고 또 마음이 놓인다고 하면서 울었습니다. 언니는 눈물 속에서도 딸을 잘 부탁한다는 말을 빼놓지 않았습니다. 얼마 전에 남쪽으로 온 언니의 딸, 제 조카가 해산달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언니는 친정엄마 없이 아이를 낳을 딸을 어미 대신 잘 해달라고 부탁하며 고맙다는 말을 여러 번 했습니다.

저는 언니에게 여기는 걱정 말라고 만나는 그날까지 아프지 말고 오래 오래 건강하게 살아야 한다고 몇 번을 곱씹어 말하고 또 말했습니다. 15년 만에 우리의 전화 통화는 이렇게 끝이 났습니다. 언니, 꼭 건강하게 오래 살아야 해요. 그래서 우리 다시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