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생각 평양생각] 황장엽 선생님과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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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어제 서울 아산 병원에 차려진 황장엽 선생님의 빈소를 다녀왔습니다. 당장이라도 저에게 손을 내밀며 반갑게 웃어주실 것만 같은 황장엽 선생님의 사진 앞에서 저는 머리를 숙인 채 눈물만 하염없이 흘렸습니다.

정말 믿어지지가 않아 저는 슬그머니 넓적다리를 꼬집어보기도 했습니다. 제가 황 선생님을 처음으로 만나 뵌 것은 2003년 12월 초였습니다. 하나원을 갓 졸업하고 서울로 배치 받은 뒤에 소개를 받고 탈북자동지회를 찾아갔습니다. 그 때 처음 황 선생님을 만나 말씀을 듣는 순간 이곳 서울에도 내가 의지할 곳이 있구나 하는 든든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후 강남에 있는 한 높은 빌딩에서 황 선생님을 조용히 만났을 때 선생님은 세 남매와 함께 남한으로 왔다는 제 말을 듣고는 힘들겠지만 아이들을 잘 키우라고 몇 번이고 당부하셨습니다. 마치 고향에 계시는 아버지를 보는 듯했습니다. 자유북한방송국에서 근무할 때도 저는 오랜 기간 일주일에 한 번씩 황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고향에 계시는 부모님이 아닌 우리 탈북자들의 태양으로 생각했습니다.

황 선생님은 지난 달 열렸던 북한해방전선 창립 행사에는 비록 오시지 못했지만, 창립을 축하하고 격려하는 편지를 보내주셨습니다. 편지 내용을 읽어드리겠습니다. "한날한시에 해방된 남과 북이지만, 오늘날 북한은 생지옥으로, 남한은 지상낙원으로 되었습니다. 모든 화근은 김정일 세습 독재집단의 천인공노한 비인간적 반역행위에 있습니다. 이러한 김정일의 마수로부터 벗어나 천신만고 다 겪으며 자유조국인 대한민국을 찾아온 탈북자들은 모두 다 죽음을 이겨낸 영웅적 투사들입니다. 때문에 탈북자들에 대한 인민들의 기대는 크고 역사와 민족 앞에 지닌 우리의 책임은 중대합니다. 김정일 악당들에 대한 심판의 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 날을 떳떳하게 맞이하기 위하여서는 무엇보다 먼저 정신적 준비가 필요합니다. 그 다음 중요한 것은 조직적 준비입니다. 애국적 신념으로 굳게 뭉친 집단은 필승불패입니다. 물질적 힘과 조건은 하나의 숭고한 정신으로 단결된 조직과 그 위력을 따라오기 마련입니다. 시작이 절반입니다. 결사의 각오로 궐기한 오늘이야말로 인민해방 위업의 승리를 위한 영광의 날로 역사에 기록될 것입니다. 우리 시대와 민족을 대표하는 슬기롭고 용감한 애국투사들의 영웅적 투쟁 모습과 빛나는 승리가 보고 싶습니다. 나는 늙고 무능한 생명이지만 동지들을 위하여 바치겠습니다."

저는 그 날 저녁 집에 돌아와서 예전에 황 선생님과 함께 찍은 사진을 한참이나 바라보며 그 많은 연세에도 북한 주민들의 인권과 해방을 위해 투신하신 황 선생님이 새삼 존경스럽게 느껴졌습니다. 아마도 보통 사람들 같으면 저 많은 나이에 방안에 들어앉아 주는 밥이나 드시고 기껏해야 마실 놀이나 다닐 텐데, 황 선생님은 북한 주민들뿐만 아니라 이곳 남한 국민들에게까지도 진실을 알려주기 위해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노력하셨습니다.

황 선생님의 말씀이 아직도 제 귓전에 들려옵니다. 휴식일이면 제일 외롭다는 말씀, 누구라도 전화 한 통을 걸어주면 제일 반갑다는 말씀, 그리고 휴식일이면 방안에서 만보 걷기 운동을 하신다는 그 말씀이 말입니다. 선생님이 생전에 얼마나 외로우셨을까 생각하면 마음이 아립니다.

선생님은 세상을 떠나셨지만, 남은 저희는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우리 아이들뿐만 아니라, 탈북 청소년들을 훌륭한 통일의 선봉자가 될 수 있도록 꾸준히 교육하겠습니다. 그리고 선배로서 후배들이 남한에 잘 정착하도록 도움이 되고, 후배로서 선배들의 좋은 모습을 본받아 갈라진 조국이 통일되는 그 날을 앞당기는데 이바지하겠습니다.

선생님, 영원히 잊지 않을 것입니다.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