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가족이 함께 오른 영인산 정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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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저는 가족과 함께 충청남도 아산시에 있는 영인산으로 등산을 다녀왔습니다. 처음 집에서 출발할 때에는 그저 영인산은 국민의 오락과 휴식, 건강을 위해 조성된 휴양림인줄 알았습니다. 더구나 손자들과 함께하는 등산이라 자그마한 야산봉우리로 착각을 했습니다만 산을 오르며 그 생각은 바뀌었습니다. 비록 정상까지는 364m밖에 안 되는 산이었지만 생각과는 전혀 다르게 잘 꾸려져 있었고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또 자녀들과 함께 등산할 수 있도록 특별하게 잘 꾸며져 있는 등산로이기도 했습니다.

자가용 승용차를 타고 산중턱까지 올라갈 수 있어서 더욱 기억에 남는 곳이기도 합니다. 처음 입구에 도착하면 아산시민인지 물어옵니다. 왜냐면 아산시민이라면 입장료를 할인해주기도 하거든요. 하지만 경기도 평택시민인 우리 요금도 별다른 차이는 없는 듯했습니다.

넓은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정상으로 올라가는 내내 저는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등산객들 속에는 막달이 돼 보이는 임산부도 사랑하는 남편과 함께 등산을 하고 있는가 하면 이제 태어난 지 돌도 안 돼 보이는 아기가 유모차에 누워 쌕쌕 자고 있는 모습도 보였고 내 가족처럼 부모의 손목을 잡고 아장아장 걸어가는 귀염둥이도, 그리고 아빠 어깨에 올라 좋아라 손뼉을 치고 깔깔대는 개구쟁이도 있었습니다.

물론 우리 집 개구쟁이들도 좋아라, 힘든 줄 모르고 서로 승강이질을 하면서 뛰다가는 숨이 차 헐떡거리기도 했습니다. 조금 올라가다 보면 운동기구도 있고 조개처럼 생긴 공연장도 있었고 산림 박물관도, 그리고 민족의 역사와 문화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아산만 일대의 국제 무역항 건설, 공업단지 조성 등 발전을 기념해 세워진 탑인 '시련과 영광의 탑'도 있었습니다.

정상으로 올라가는 중간에는 넓은 잔디밭으로 꾸며져 있는가 하면 갖가지 작은 나무들로 이루어진 수목원도 잘 조성되어 있었고 돌로 만들어져 있는 조각들과 작은 폭포도 만들어져 있어 더더욱 아름다움과 웅장함이 잘 어울렸습니다. 특히 정상에서 바라보이는 넓은 벌에는 누렇게 익은 황금색 벌판과 아산 시가지, 멀리 바라보이는 평택호와 평택 시가지뿐 아니라 넓은 서해바다를 가로지르는 서해대교가 한눈에 들어 왔습니다.

아이들은 얼룩무늬를 가진 범나비, 메뚜기를 비롯한 곤충들이 있어 더욱 좋아라 했습니다. 정상에서 아래로 흐르는 작은 계곡이 있어 손자들은 올라가면서 흐르는 계곡물에 손과 발을 잠깐씩 담가보기도 하면서 뜨거운 가을 햇볕을 피해 시원함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손자들의 손목을 잡고 등산하는 내내 숲속에 아담하게 지어져 있는 버섯 모양의 숙소와 통나무로 지어 만든 숙소가 있었는데 눈길을 뗄 수 없었습니다. 한국에서 경치 좋고 공기 좋은 곳은 가는 곳마다 많고 많지만 이곳 영인 휴양림은 제가 살고 있는 집에서 자가용 승용차로 30분 거리면 갈 수 있는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었기에 저는 내년 여름휴가엔 비록 예약하기 어렵다고 하지만 꼭 이곳을 다시 찾겠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저는 쑥부쟁이와 쐐기풀, 억새풀을 배경으로 손자들과 함께, 또 땀을 흘리며 열심히 걷는 손자들의 모습도, 가족들과 함께하는 등산 기념으로도 찰칵 사진을 찍었습니다. 정상에서 잠깐 쉬면서 싸갖고 간 과일과 음료수를 마시며 얘기하다 고향에 대한 지나간 추억도 해보았습니다. 고향이 함북도인 며느리는 집 주변에 아주 큰 산들이 많았지만 철부지여서인지 등산은 해 보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고향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도 전혀 느껴보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큰딸은 평양시내에도 모란봉과 창광산 그리고 또 집 근처 무력부 청사 뒤에 장산이 있었는데 봄에는 살구꽃과 복숭아꽃, 아카시아 꽃, 개나리꽃들이 피고 철쭉꽃, 진달래꽃이 많이 피고 모란봉에서 내려다보이는 굽이굽이 흐르는 대동강 역시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고 멋있었지만 무슨 통제 구역이 그리 많은지 자유롭게 구경할 수가 없었다고 서운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이야기꽃을 피우며 가족 등산을 마친 우리 가족은 아산만으로 향했습니다. 지금 한창 많이 잡히는 생선 전어와 대하, 꽃게 역시 제철 해산물이라 우리는 대하구이와 조개구이에 저녁식사를 했습니다. 식사를 하며 지난날 북한에서 손전화 없이, 또 자가용 승용차 없이 어떻게 살아왔을까 하는 아이들의 말에 귀 기울이며 저는 밀려나가는 서해 바닷물을 바라보면서 잠시 잠깐 고향 생각을 더듬어 보았습니다.

100리 길은 보통으로 생각하며 걸어 다녔던 고향에서의 힘들고 어려웠던 나날들, 그리고 우리 아이들을 위해 뭔가 해주고 싶어도 해줄 수 없었던 고향에서의 마음 아팠던 추억들, 지금도 내 고향의 주민들은 그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을 하니 가슴이 짠했습니다.

오늘도 저는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10월의 가을, 즐거운 추억을 만들었습니다. 서울에서 김춘애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