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은 깊어가고 사랑은 익어 간다는 아름다웠던 10월도 어느덧 지나고 11월이 됐습니다. 10월의 막바지인 지난 주말이었습니다. 유유히 흐르는 한강을 바라보며 아름답게 가꾸어 놓은 양화진 성지에서 22회 '여성백일장'이 열렸습니다. 조용한 공원에 있는 오색 단풍잎들은 보면 볼수록 아름답고 서울시 중심에서 유유히 흐르는 한강 물은 보면 볼수록 웅장합니다.
서울 마포 신문사와 민주 평화통일 자문회의 마포구협의회 주최로 열린 '여성 백일장'은 많은 시민들이 모여 '평화 통일'과 '세월'이라는 주제로 글을 썼습니다. 참가자들은 20대에서 80대까지 여성들이었습니다.
오전 11시에 시작된 행사는 오후 12시부터 글짓기를 시작해 1시에 제출해야 했습니다. 따가운 가을 햇살에 잔등은 뜨거웠지만 누렇게 마른 금잔디 밭에 깔개를 펴고 모여 앉아 글을 쓰는 이들도 있었고, 어린 소녀 마냥 잔디밭에 엎드려 공중에 엉덩이를 쳐든 채 열심히 글을 쓰는 이들도 있었으며, 경사지에 앉아 들고 간 가방 위에 종이를 놓고 볼펜을 든 채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남들은 한창 시와 글짓기에 골똘해 있는 반면에 아무 생각 없이 모여 앉아 떡과 음식을 먹는 사람들도 있었고 어떤 이들은 모여 앉아 준비해 간 도시락을 먹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글 쓰는 모양새는 그야말로 각양각색이었으나 그들 모두 시인 같고 작가 같은 분위기였습니다. 저는 몇몇 친구들과 함께 한강이 한눈에 바라보이는 어느 천주교 성당 주변의 돌계단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글을 쓰려고 보니, 어느덧 세월은 저 한강 물처럼 소리 없이 유수와 같이 흐르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정말 해 놓은 일도 없는데 정신없이 가는 세월을 멈출 수 없는 것이 안타깝다고 하자 한 친구는 40대까지만 해도 그렇게 나이 먹는 것을 몰랐는데 나이 50이 되니 몇 번 눈을 감았다 뜨니 벌써 55살이 됐다고 하면서 신발 한 짝을 벗어 손에 들고 땅을 치면서 '청춘을 돌려다오'라는 노래를 불러 우리 모두 웃었습니다.
저 역시 그들과 함께 큰 소리로 웃었지만 떨어진 낙엽을 손에 들고 있는 제 마음은 조금 서글퍼졌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21회 여성백일장 장원작인 '코스모스'라는 시를 읽었습니다. '코스모스 고운 날에, 실바람 흥에 겨워, 하늘하늘 춤을 추고, 젊은 남녀 사랑의 결실을 맺는, 이 계절에 문득, 저 세상에 계신 아버지의 얼굴이 스친다, 슬하에 팔남매를 두신 친정아버지, 그중 나는 여섯 번째 딸, 그리고 1968년 내 나이 열여덟 되던 해, 어머니께서 갑작스레 생의 끈을 놓으시자, 끝으로 삼남매에 대한 염려가 태산이었다, 그렇게 십년이 흐르고, 여섯 번째 딸이 혼기가 가득하자, 어머니의 빈자리에서, 온밤을 하얗게 지새우셨던 아버지, 코스모스 세월 따라 피고지고 피고지고 하여, 그때의 아버지 자리에 당도하니, 그 깊은 사랑이 더욱 그리워라.' 시를 읽어 내리는 작은 내 목소리에 친구들의 눈가엔 이미 눈물이 글썽했습니다.
우리 중에는 정든 고향을 떠나 두만강에 피눈물을 뿌리며 죽지 않으면 살겠지 하는 굳은 각오로, 어떤 이는 이제 태어난 지 얼마 안 되는 아기에게 술과 마취제를 먹여 배낭에 넣은 채 등에 지고 두만강을 넘었고 또 한 친구는 더는 못 가겠다고 주저앉는 80이 넘은 어머니를 등에 업고 물살 빠른 두만강 여울목을 건너오다가 넘어져 정처 없이 떠내려가면서도 꼭 살아야 한다고 한 번도 불러 보지 못한 하나님을 불렀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힘들고 무서운 두만강을 남들은 한 번 넘었지만 저처럼 여러 번 죽음을 각오하고 넘은 사람도 있었고, 남편과 함께 두만강을 넘어왔지만 사랑하는 남편을 조선족 여성에게 빼앗기고 홀로 고생하던 끝에 이곳 대한민국에 온 친구도 있었고, 북한에는 남편과 아들이, 여기 대한민국에는 어머니와 딸이, 영국에는 또 큰아들이, 이렇게 온 식구가 세 나라에 갈라져 이산가족의 아픔을 겪고 있는 친구도 있었습니다.
서로가 서로의 아픈 상처를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는 친구들이었습니다. 많은 생각을 하던 친구들은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읽어준 한 편의 시가 도움이 된 듯도 합니다. 드디어 시간이 되어 본인들이 쓴 글을 주최 측에 제출했습니다. 곧이어 작품 심사와 경품 추첨 및 가수들의 공연이 시작됐습니다.
참으로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저는 비록 경품과 상장을 받지는 못했지만 전기로 간단하게 식품을 가열하는 조리기구인 전자레인지를 탄 친구도 있었고 전기밥솥과 자전거를 탄 친구도 있었습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80이 훨씬 넘은 어르신이 대상을 탔다는 것이었습니다. 기쁨의 눈물, 행복의 눈물을 흘리는 그 어르신을 바라보며 저는 잠시 잠깐 어머니를 그려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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