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생각 평양생각] 하나원에서 걸려온 조카의 전화

0:00 / 0:00

며칠 전, 저녁 퇴근을 앞두고 마무리 작업으로 한창 바쁜 시간에 손전화기가 울렸습니다. 제 기억에도 없는 경기도 지역 전화번호였습니다. 손전화기를 받아보니 귀에 익은 목소리였습니다. 몇 년 만에 들어보는 조카의 평양 말이었습니다. 오랜 세월 떨어져 있는 동안, 이모의 목소리를 잊은 듯한 조카는 제 이름을 확인한 후에야 울먹이는 목소리로 이모라고 불렀습니다.

조카 목소리를 듣는 순간, 제 눈엔 10여년 전, 단정한 학생 교복에 붉은 넥타이를 목에 두른 조카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제가 탈북 할 당시에 조카는 이미 군에 가 있었기 때문에 성숙한 모습은 보지 못했습니다. 제가 기억하고 있는 조카의 모습은 중학교 교복을 입고, 4.25 국방체육단에 사격훈련을 하러 다니던 모습이었고, 말괄량이인 제 언니를 피해 작은 책상에 마주 앉아 책만 읽고 있던 연약한 모습이었습니다.

저는 조카에게 어떻게 된 일인지 물었습니다. 조카는 작년 11월에 고향을 떠나 한국에 입국했다고 했습니다. 그 동안 조사를 받았고, 이 달에 탈북자들의 사회정착 지원시설인 하나원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조카를 만나러 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고 해서 내년 1월 말에 하나원을 수료하면 그때 서로 만나자고 했습니다.

오랜 만에 이모를 불러본 조카는 울먹울먹하면서도 우리 아이들에 대한 소식을 물어왔습니다. 비록 나이 어린 조카였지만, 저는 우리 아이들이 이곳 남한에 잘 정착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랑 삼아 했습니다. 조카는 작년에 평양을 떠나올 때 엄마와 아빠가 많이 앓고 계셨는데,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다며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그 얘기를 듣고 저도 마음이 아팠습니다. 언니와 헤어진 지도 벌써 15년이란 세월이 흘러가고 있구나,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는데, 사랑하는 언니의 나이도 어느덧 60이 넘었으니, 언니 머리에도 이젠 흰서리가 내렸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니 아련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조카와 전화를 한 뒤 퇴근해서 집으로 오는 길 내내 고향에 있는 언니와 형제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저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15년 전 정든 고향 평양에서 통행증 없이 제 큰딸을 찾아 함북도로 떠날 때 언니는 약주를 한 잔 부어 주고, 제 손엔 바꾼 돈 10원짜리를 꼭 쥐어주면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무사히 돌아오라고 신신 당부했습니다. 그런데, 그때의 이별이 기약 없는 이별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이젠 부모님도 세상을 떠났고, 우리 형제에게는 언니가 부모 대신인데 그런 언니가 앓고 있다는 소식을 직접 들으니 걱정이 되고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남한에 있는 좋은 약이라도 보내면 병이 좀 나을텐데 안타까운 마음만 가득했습니다.

몇 주 전에 저는 금강산에서 남북 이산가족들이 만나는 모습을 텔레비전으로 보면서 함께 이산가족이 된 것처럼 그들과 함께 울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러웠습니다. 짧은 만남을 뒤로 하고 다시 기약 없는 이별을 하는 순간, 서로서로 부둥켜안기도 하고 두 손을 꼭 잡고 얼굴을 쓸어주며 헤어지기 아쉬워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이산가족들을 보면서 저는 언제쯤 사랑하는 형제들과의 상봉을 하고, 소리 내어 기쁨의 눈물을 흘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텔레비전 앞에서 떠나지 못했습니다.

갈라진 남북이 통일이 되면 저는 자가용 승용차에 사랑하는 형제들을 모시고, 평양 시내를 몇 바퀴를 돌기도 하고, 대동강 유보도의 의자에 앉아 지나간 얘기도 하면서 손수건으로 서로 눈물도 닦아 주렵니다. 옥류관의 쟁반국수도 함께 먹고, 보통강 반에 자리 잡고 있는 청류관에서는 고향에 돌아온 기쁨을 만끽하며 시원한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습니다. 그 날까지 우리 형제들 모두가 아프지 말고 건강한 모습으로 있기를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북녘 하늘을 우러러 사랑하는 언니와 형부가 빨리 완쾌되기를 간절히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