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 부여군 옥산면에 다녀왔습니다. 남편의 고향이거든요. 시제가 있다고 하네요. 시제란 조상님들의 묘를 찾아 1년에 한 번씩 지내는 제사라 합니다. 처음 이 단어를 들었을 때 이해가 되지 않았고, 이 나이 되도록 시제라는 말을 모른다는 것은 조금 쑥스러운 일이라 출발하기 전날 슬그머니 인터넷으로 찾아보았습니다.
우리 민족이 예로부터 모시는 제사에는 돌아가신 날에 지내는 기일제사가 있고 설이나 추석 같은 명절에 지내는 차례제사가 있으며, 시제라는 말은 대개 음력 10월 5대조 이상의 조상의 묘소에서 지내는 제사라고 합니다. 그래도 처음 참가해 보는 시제라 궁금증이 잘 풀리지 않았습니다.
남편이 나서 자란 고향이라는 생각에 조금은 설레기도 했습니다. 하루 먼저 부여에 도착한 저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초등학교에도 가 보았고 고등학교에도 가 보았습니다. 그리고 조선시대 지방행정기구의 청사가 있었던 관아에도 가 보았습니다. 아침 일찍 출발해 가는 내내 궁금했던 것은 남편이 나서 자랐다는 집이었습니다.
오랜 세월 사람이 살지 않아 집은 없었고 집터와 흔적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저 감나무 3그루가 전부였습니다. 주인이 없는 감나무에는 빨간 감이 그대로 나무 가지가 휘어질 정도로 달려 있었습니다. 저는 빨간 감 한 알을 따서 입에 넣었습니다. 그야말로 꿀맛 같이 달면서도 입안이 텁텁하네요. 그런 맛이라 해도 그런대로 한 알을 다 먹었습니다.
고향에 갔던 기념으로 가지를 채로 꺾어서 담기도 했습니다.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는 옥산 저수지가 있었고 뒤에는 비홍산, 건너편에는 각시봉이 있었습니다. 기러기가 날아다닌다고 해 비홍산이라고 하고 또 기러기가 연못에 모여 있다고 해서 마을 이름을 홍연리라고… 남편은 쉴 새 없이 자랑을 늘어놓았습니다. 멀리 바라보이는 각시봉과 비홍산은 산새도 좋았지만 한창 단풍이 절정이라 아름다움이 황홀할 정도였습니다.
연못에서는 큰 물고기들이 뛰어 오르는 모습도 보였습니다. 그 주변에 있는 많은 논밭과 산이 모두 남편의 것이었다고 자랑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습니다. 남편에게 "누구는 황 지주였지만 누구는 이 지주였네요" 라면서 핀잔도 주었습니다. 남편이 어린 시절 다녔다던 초등학교는 폐허가 되어 빈 건물로 남아 있었습니다.
드디어 다음날 시제가 있었습니다. 묘소를 찾아올라 가는데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용인 이씨 32대 33대 34대 35대 라고 씌어진 비석이 있었습니다. 제일 어르신이신 고조할아버지 묘소 앞에 상을 차려 놓고는 장손이 앞에 서서 용인 이 씨의 집안 역사를 풀었습니다. 1시간이 걸렸습니다. 조금은 추웠지만도 저에게는 처음으로 체험해 보는 집안의 행사였습니다.
점심식사는 민물 매운탕이었습니다. 집으로 오는 도중에 보령에 있는 탄광박물관에 들려 관광도 하고 단풍 구경도 했습니다. 내 고향에서는 한식과 추석 그리고 기일제만 지내는 풍습만을 알고 있었는데 처음 접해 본 시제에 대한 새로운 제사 문화를 직접 체험해 보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제 나이 60이 넘었지만 우리 부모님을 낳아주고 키워 주신 할아버지 할머니 밖에 모르고 살아 왔거든요. 증조 할아버지가 누구인지 심지어는 고조할아버지가 누구인지 이름조차 들어 보지도 불러 보지도 못하고 살아왔습니다. 조상에 대해서 알려고도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모르고 살아 왔다는 것이 내 자녀들에게 조금은 부끄러웠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너무도 어린 5살 나이에 양 부모가 다 돌아 가셨기 때문에 조부모나 조상님에 대해 부모님에게도 들어 보지 못했지만 그래도 부모님께 조상에 대해 묻지도 않은 것이 후회되기도 하네요.
비록 남편의 고향이었지만 제 고향을 다녀온 기분이기도 했습니다. 남편은 늦둥이로 태어났기에 남편의 짜개 바지 시절 고향 동창이지만 촌수로는 조카뻘이거나 조카사위들이라 너무도 반가운 얼굴들이었습니다. 남편의 동창들은 한결같이 통일이 되면 내 고향 평양에 함께 가자고 하네요. 저 역시 꼭 고향에 가서 우리 조상의 묘소를 찾아보렵니다. 서울에서 김춘애입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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