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쌀한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은행나무 잎이 우수수 떨어지네요. 한들한들 춤을 추며 떨어지는 나뭇잎이 발에 밟힐까 두려워 사뿐사뿐 걸어가는데 이제 초등학교 3학년에 다니는 손녀의 전화가 걸려옵니다. 할머니에게 궁금한 것이 있다고 합니다. 뭐냐고 물었더니 손녀는 뜬금없이 할머니의 할머니 이름은 무엇인지 또 그분은 어떤 분이셨는지 묻네요.
손녀는 하루가 다르게 철이 들어갑니다. 언젠가는 할머니 고향이 북한이라는 것을 알고는 삐져서 하루 종일 입을 꼭 다문 채 말도 하지 않았던 아이였건만 요즘에는 자주 할머니의 고향과 조상들 그리고 친척들의 촌수에 대해 자주 물어 오곤 합니다. 하기에 저는 손녀 덕분에 자주 고향에 대한 추억에 빠져들게 됩니다.
손녀와 이 할미는 텔레파시가 통했나 봅니다. 어제는 바로 나를 낳아주고 키워 주신 아버님의 생신이었거든요. 봄에는 새 눈이 트고, 어느새 파란 잎이 되어 한여름 푸른색으로 아름다워지고 많은 사람들에게 더위를 덜어주는 시원함을 주던 나무 잎이, 가을이 되어 단풍으로 물들여 또 많은 사람들에게 웅장함과 아름다움을 주고, 결국 그 잎들이 어느새 가랑잎이 되어 땅에 떨어져 사람들의 발에 밟히고 빗자루에 쓸려 쓰레기장으로 실려 가는 아쉬움이 느껴지는 이 계절, 인생은 너무 짧다는 생각과 더불어 손녀의 질문에 어제가 아버님 생신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답니다.
행복한 삶에 도취되어 그만 아버님의 생신을 잊을 법한 저는 자책감을 조금 가지고는 하늘나라에 계시는 부모님께 한마디 합니다. 나를 낳아주고 다른 집 애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예쁘게 키워 주신 부모님, 정말 감사하고 고맙다는 말 한마디 표현해보지 못했습니다. 고맙고 감사하다는 것을 너무도 모른 채 응당 당연한 것으로 알고 살아왔습니다. 지난 세월 간장에 절고 소금에 절고 쓴맛 단맛 다 겪어보았고, 지금은 생각도 할 수 없고 상상도 할 수 없는 천국 같은 세상에 와서 살면서 이제서야 조금은 철이 든 것 같네요. 철들고 보니 어느새 저는 부모님 나이가 되었습니다. 이 나이 들도록 부모님에게 사랑한다는 말 한 마디 해주지 못했습니다.
사실 이곳에 처음 와서 남한의 엄마들이 자녀들에게 "아들 사랑해!" 또한 가족들이 "부모님 사랑해요!", "여보 사랑해!" 이런 말들을 당당하게 하는 모습을 보면서 어색하면서도 남모르게 부러워했습니다. 때로는 손전화기 문자로 "아들 사랑해!" "딸 사랑해" 하는 문자를 쓰고 지우고를 여러번 반복해 보았지만 끝내는 전송하지 못했거든요.
2년 전 강원도 최전방 군부대 강의를 가는 도중 고속버스 안에서 한 아줌마가 아들에게 전화하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나도 모르게 용기를 내어 "아들 사랑해!"라는 문자를 보낸 적이 있거든요. 그랬더니 아들로 부터 "엄마 아침에 뭐 잘못 먹었나? ㅠ.ㅠ" 하는 문자가 날아왔습니다. 순간 제 얼굴이 빨개졌습니다만 인제는 손자들에게만큼은 사랑한다는 말이 아주 편하고 자연스럽고 스스럼없이 나온답니다.
사실 제가 어린 시절에는 아버님이 군인이다 보니 한 달에 한 번, 혹은 몇 달에 한 번씩 아버지의 얼굴을 볼 수 있었습니다.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보는 셈이었는데 게다가 고등중학교를 졸업하고 저는 18살에 입대하여 10년간 군 생활을 했습니다. 이후 제대되어 결혼하고 가정생활을 하다 보니 부모님과는 겨우 1년에 한 번 볼까 말까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부모님께 제대로된 생일상 한번 차려 드리지 못한 것 같네요.
아버님 환갑잔치에도 찾아뵙지 못했고 평양시 중요한 행사참가로 아버님이 사망되었다는 전보를 받고도 달려가지 못했습니다. 불효자식이라는 자책감으로 항상 마음이 아픕니다. 통일이 되는 날 제일 먼저 아버님의 손자들과 증손자들과 함께 아버님이 제일 좋아하시던 인삼 소주에 파란 생오이와 빨간 고추장을 들고 부모님의 묘소를 찾아 가렵니다.
먼 옛날 어머님이 우리 7남매를 키우며 항상 얼굴도 모르는 친할아버지, 할머니의 이름과 함께 본을 외워 주듯이 오늘도 저는 어머님이 하시던 그대로 손녀와 함께 손전화기로 증조외할아버지, 외할머니의 이름과 고향을 하나하나 익혀 주네요. 서울에서 김춘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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