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생각 평양생각] 송년회 장기 자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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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이 되면 기업이나 각 모임, 단체들은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송년회를 엽니다. 그래서 연말이 되면 서로 약속 잡기가 어려워지는데요. 얼마 전 친한 동생 소연이가 저를 찾아왔습니다. 회사에서 송년회가 있는데 가족 단위로 장기 자랑을 한다고 합니다. 회사 직원들은 회사 업무를 마치고 가족들과 함께 노래방에 들려 장기자랑 연습을 열심히 하고 있다는 소연이의 얼굴에는 그늘이 져 있었습니다.

소연이와 저는 한 회사에서 함께 근무한 적이 있어 항상 저를 이모라고 편안하게 불러왔고 또 자주 만나곤 하는 딸과 같은 친구이기도 하고 때로는 나이 차이가 많은 동생 같기도 한 친구랍니다. 소연이는 이곳 한국에 온 지 5년이 조금 지났습니다.

하지만 그는 나이 많은 부모님의 막내로 태어나 이곳 한국에 홀로 왔고 아직 결혼 전이라 친척도, 아는 이도 하나 없는 조금 외로운 친구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가족 장기자랑에 같이 나갈 가족이 없어 얼굴이 어두웠던 겁니다. 그런 중요한 자리에 제가 절대 빠질 사람이 아니죠. 하여 저는 같은 회사에서 함께 근무하던 아주 친한 친구를 불렀습니다. 모임 장소에서 한 명은 노래하고 우리는 춤을 추기로 결정을 했습니다만 은근히 걱정이 되기도 했습니다.

다른 가족들은 며칠 전부터 연습을 하느라 목이 쉬었다는데 소연이와 우리는 하루 전날 모여 그저 말로만 정했습니다. 자기 애창곡인 찔레꽃을 부르겠다고 우기는 친구를 설득해 노래 제목은 '비 내리는 호남선'으로 선택했습니다. 드디어 다음날 일이 끝나는 대로 친구와 함께 퇴근해 부지런히 전철을 타고 등촌동에 있는 그린 월드 호텔로 갔습니다.

제가 보기에도 고급 호텔이었고 이미 많은 사람들이 도착해 있었습니다. 고급 뷔페 음식으로 식사를 하고는 드디어 회사 사장님의 인사가 있었고 가족 단위로 장기 자랑이 시작됐습니다. 처음 출연한 가족은 젊은 부부가 6살짜리 아들과 함께 요즘 널리 뜨고 있는 싸이의 강남스타일을 불렀습니다. 다음에는 아빠와 아들이 기타를 들고 나와 노래를 불렀는데 너무도 잘했고 한 여성 직원의 부모는 춤을 추었습니다.

한 번도 맞추어 보지 못한 우리는 그만 기가 죽었습니다. 소연이가 그 회사에 취직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제가 사장님에게 소개해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소연이를 실망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저는 어떻게 하면 많은 사람들을 웃기고 즐겁게 해드릴 수 있을까 궁리하던 중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오늘은 내가 완전히 망가져 보자, 흰 종이를 머리를 묶었습니다. 그리고는 조금 망설이는 친구를 끌고 무대로 올라갔습니다. 앞으로 나가고 있는 우리를 보는 사람들은 뭔가 낌새가 다르다고 했습니다. 친구가 부르는 노래에 맞추어 저는 순서 없는 막춤을 췄습니다. 그게 그만 판이 커져 다른 이들도 나와 함께 춤을 추었습니다. 노래 소리보다도 제 막춤에 사장님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배를 쥐고 웃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날이 이곳 한국생활에서 맨 처음으로, 또 최고로 제가 망가졌던 날이었습니다. 포도주 한 잔 마시고 말짱한 정신으로 정말 그날처럼 망가졌던 적은 없는 듯합니다. 하지만 저는 행복하고 즐거웠습니다. 비록 탈북자이지만 이곳 대한민국에서 태를 묻고 살아온 사람들과 당당하게 장기 자랑대결을 해 우승을 했기에 너무도 뿌듯했습니다.

우리는 비록 이곳에 친척이나 아는 이 하나 없지만 절대로 외롭지 않습니다. 우리 탈북자들이 당당하게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하면서 이곳 한국 사람들과 함께 나란히 즐겁고 행복한 새 삶을 살고 있는 모습을 보면 정말 뿌듯합니다.

그들이 내 자식 같고 때로는 친동생 같기도 하고 때로는 내 조카처럼 대견하고 사랑스럽습니다. 한 친구는 경품 추첨에 당첨이 되어 비타민 약을 선물로 받았고 또 한 친구는 포도주를 선물로 받았고 저는 청소기를 상으로 받아 안고 택시를 타고 집으로 오면서 우리는 지난 북한에서의 생활을 잠깐 추억해 보았습니다.

북한에서도 해마다 12월이면 송년회를 합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반생을 살아온 나와 친구들도 크게 생각나는 추억이 별로 없다고 합니다. 만약 지금도 우리가 북한에 살고 있다면 이런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이 우리 인생에 몇 번이나 있었을까, 저 역시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기억에 남지는 않을 듯합니다. 북한에서 50년을 살아온 날보다 5분의 1밖에 안 되는 이곳 한국생활에서의 행복한 추억이 더 많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