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엽과 여자의 일생

청명한 가을 날씨를 보인 20일 오후 시민들이 가을색으로 물든 덕수궁을 거닐고 있다.
청명한 가을 날씨를 보인 20일 오후 시민들이 가을색으로 물든 덕수궁을 거닐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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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어지는 낙엽을 보고 있노라니 올해는 보다 여느 때 없이 시간과 세월이 너무도 빨리 흘러간다는 생각이 드네요. 떨어지는 낙엽과 함께 쓸쓸함을 달래며 우연히 만난 친구들과 이런 얘기 저런 얘기로 수다를 떨던 중에 슈퍼에서 막걸리를 구입해 동네 정자에 자리 잡고 앉았습니다. 또 여자 셋이 모이면 먹을거리 얘기부터 시작해 자녀들 키우던 얘기와 더불어 요즘은 손자 자랑까지 하느라 정말 시간 가는 줄 모릅니다.

엊그제만 해도 노란색으로 단풍이든 은행나무가 예뻤었는데, 벌써 그 예쁘던 은행나무 잎이 어느새 다 떨어져 경비원 아저씨들이 열심히 쓸어 모으고 있었습니다. 순간 저는 김이 물몰 나는 금붕어 빵에 막걸리 한잔 마시며 앙상하게 남은 나무 가지들을 쳐다보면서 문득 현재의 제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어려운 길을 택해 이곳 한국에 처음 왔을 때까지만 해도 한창 나이었는데 벌써 검은 머리 흰서리가 내려 인제는 볼모양이 없어졌습니다. 더 이상 더 변하지 않고 더도 말고 10년만 건강한 모습으로 살았으면 하는 생각이 뜬금없이 들었거든요.

왜 한 번쯤은 또 가끔은 내가 살아온 인생살이, 각자 걸어온 길을 뒤돌아보는 계기가 되는 순간이 있습니다만 저에게 있어서 그 순간이 바로 그때였던 것 같습니다. 고향에서는 미처 몰랐습니다. 아름다운 꽃이 피는 계절은 바로 여자들의 봄이라고 하죠. 꽃이 활짝 피는 봄과 빨간 장미꽃이 피는 여름도, 열매가 무르익고 단풍이 드는 가을과 눈이 펑펑 쏟아져 내리는 웅장하고 시원한 겨울, 사계절의 아름다움을 미처 모르고 살았습니다.

하지만 계절마다 자기 특색을 자랑하고 뽐내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더불어 하루하루 나이 들어가는 모습이 바로 저 앙상한 나뭇가지가 아닌가하는 생각을 하면 쓸쓸함을 떨쳐버릴 수 없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고향이 황해도인 실향민의 자녀인 친구는 언니는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고 있는가 하면서 더 늙지 말고 건강하라는 의미에서 한 잔 하자고 막걸리잔 을 저에게 권합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노란 은행잎이 달려 있었고 잎이 무성했는데 벌써 다 떨어지고 앙상하게 가지만 남았으니 은행나무도 가는 세월을 아쉬워하는 우리들처럼 옆구리가 춥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쓸쓸해지면서 어찌 보면 우리 인생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부모님의 고향이 황해도인 실향민 2세대 친구는 부모님의 고향이 강하나를 사이에 두고 빤히 바라보면서도 갈 수 없는 바로 파주철책선 너머라고 합니다. 친척들은 모두 그곳에 살고 있다고 합니다.

해마다 추석 명절이면 부모님들은 임진각이나 통일 전망대에 올라 쌍안경으로 고향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린다고 합니다. 부모님들이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마음이 짠해 죽을 맛이라고 합니다. 철없고 젊은 시절에는 부모님의 마음을 잘 몰랐었는데 지금은 나이가 들고 보니 부모님의 심정이 이해된다고 합니다. 이제는 당신들의 자녀들은 다 자라 어른이 되었고 손자 녀석들을 두고 있어 괜찮지만 자녀들을 키우던 젊은 시절에는 친척 친구가 없어 많이 외롭게 살았다고 합니다.

떨어지는 나뭇잎과 흐르는 물을 바라 볼 때면 본인 자신이 나이 들어 쓸쓸한 것보다는 부모님이 고향에 가보지 못하고 돌아가실까 그것이 두려워 마음이 쓸쓸하다고 덧붙였습니다. 그 친구는 나를 보면 어쩌면 자기 부모님들의 예전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조금 짠하다고 합니다.

또 다른 친구는 저와 같은 고향인 청진이었습니다. 이곳 일산에서 만난 친구였는데 그 친구의 나이는 저와 동갑내기였습니다. 사실 동갑내기 만나기란 그리 헐치(쉽지)는 않았지만 제가 동갑내기 친구를 자주 만나는 걸 보면 남들보다 확실히 복이 많은 사람인가 봅니다.

그 친구 역시 예전에는 몰랐는데 확실히 시간과 세월이 흘러가는 것이 아쉽다고 말합니다. 그때에는 왜 그리 모자라고 바라는 것이 많았던지 마음의 여유조차 없었다고 합니다. 북한에도 사계절이 있었는데 자유도 없었지만도 편안한 날이 하루도 없었다고 합니다. 눈이 떨어지면 조직 생활부터 시작해 조직 생활로 하루가 끝나고 여유시간이 조금 있으면 먹고 살 일, 때거리 걱정 때문에 언제 단풍 구경 가고 언제 꽃구경 갈 생각조차 여유를 가지지 못했다고 하면서 그때도 여자라서 여자의 마음은 똑같은데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고 말합니다.

여자라는 말에 우리는 쓸쓸하게 웃었습니다. 더욱이 남한이 아니라면 남과 북의 여성 세명이 이렇게 모여 마을 정자에 앉아 이런 막걸리를 마실 수나 있겠냐하는 말에 또 한바탕 웃었습니다. 비 온 뒤라 조금은 추웠지만 우선 마음이 훈훈하다 보니 그리 춥지가 않았습니다. 춥고 춥지 않은 것도 아마 행복 지수가 얼마나 높은 가에 따라 달라지나 봅니다.

좋은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의 담배 연기만 봐도 추위가 가셔진다고 하는데 좋은 친구들과 즐거운 마음을 서로 나누다 보니 추위도 물러가는가 봅니다. 오늘도 남과 북한 친구들이 모여 정자에 앉아 막걸리 한 병과 붕어빵을 앞에 두고 살아온 추억과 인생의 회포를 나누는 좋은 하루였습니다. 서울에서 김춘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