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눈 오던 날

0:00 / 0:00

11월의 저녁노을이 지는 지난주 늦은 밤 함박눈이 펑펑 내렸습니다. 전날 텔레비전 뉴스에서 함박눈이 내릴 것이라는 기상예보가 있었습니다. 갑자기 텔레비전 앞에서 손녀가 깡충깡충 뛰며 좋아라 손뼉을 치기도 했습니다. 이전에 눈이 내리면 할미와 눈사람도 만들고 눈싸움도 한다고 마냥 눈이 내릴 날을 기다리고 있었거든요.

늦은 밤에도 여러 번 반복해 커튼을 들추고 창문을 내다보기도 하면서 빨리 눈이 내리길 바란다는 기도도 하면서 수선을 떨었답니다. 때론 창밖을 보고 또 봐도 눈이 내리지 않는다면서 텔레비전에서 거짓말을 한 거 아니냐고도 했습니다. 그러는 손녀의 천진난만한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할미인 저 역시 웃음이 났습니다. 다음날 이른 새벽 일찍 출발해 강원도 홍천으로 갔다가 늦은 오후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로 오는데 펑펑 내리는 함박눈이 앞을 가렸습니다.

집에 가면 손녀와 이미 약속한 눈사람을 굴릴 생각을 하니 은근히 마음이 설렜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며 혼자 싱글벙글 웃다보니 여느 때 없이 버스 속도가 자꾸만 늦어지는 것 같아 조급해졌습니다. 집에 도착해 보니 제가 살고 있는 평택에는 눈이 내리지 않아 서운해 할 손녀가 떠올라 저도 서운해졌습니다.

그런데 늦은 저녁을 먹다가 창밖을 내다보던 손녀가 눈이 내린다고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저녁식사도 채 끝이 나지 않았는데 손녀는 빨리 밖으로 나가자고 졸라댔습니다. 빠른 솜씨로 설거지를 마친 저는 든든하게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금방 눈이 내리기 시작한 터라 손으로 눈사람을 빚을 만큼은 아직 이른 듯했습니다.

하지만 손녀와 저는 손으로 빚고 빚어 여러 번 만에야 겨우 고사리 같이 작은 손녀의 엄지손가락만한 눈사람을 만들었습니다. 오다말다 하던 눈은 끝내 함박눈이 되어 펑펑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신나게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또 추운 줄도 모르고 굴리고 또 굴려 물동이 만하게 눈사람을 빚고는 나뭇가지로 눈과 코, 입을 붙였고 손녀가 가지고 나간 까만 볼펜으로 수염을 그려 제법 물동이만큼 큰 눈사람을 빚어 아파트 정문 앞에 세워 놓았습니다.

어린 손녀와 이리 뛰고 저리 뛰다 보니 몸에는 땀이 났습니다. 갑자기 손녀는 눈덩이를 한 움큼 쥐어 이 할미에게 뿌리기도 했습니다. 비록 할미지만 저 역시 손녀에게 질 수는 없어 눈을 쥐어 뿌렸습니다. 즐거워하는 손녀의 모습을 보니 저 역시 너무 행복했습니다.

제 입에서 나오는 입김을 보면서 손녀는 연기가 난다고 하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할미와 손녀의 웃음소리는 온 동네 떠나 갈듯했습니다. 아기 눈사람을 만들어야 한다는 손녀의 고집에 다시 작은 눈사람을 하나 더 만들었습니다. 고사리 같이 작은 손으로 눈사람을 굴리면서 좋아하는 손녀의 모습에서 다시 시간을 돌릴 수 없는 지난 어린 시절의 제 모습을 추억해 보았습니다.

어린 시절 딸부자 집 둘째 딸로 자란 저는 추운 겨울 함박눈이 내리는 날이면 꼭 동생들과 함께 눈사람을 만들었거든요.

처음에는 바쁘신 부모님의 일손을 도와 마당에 쌓인 눈을 치우기 시작하다가 나중에는 동생들과 함께 눈사람을 만들고 또 눈싸움을 해서 결국 우리만의 즐거운 시간이 됐습니다. 해마다 1월1일 설 명절이 되면 꼭 동생들은 눈사람을 만들어 집 대문 앞에 세워 놓는 것이 습관이 되었답니다.

그러다 보니 눈이 내리는 날이면 대문 앞에는 언제나 크고 작은 여섯 개의 눈사람이 우뚝 서 있었거든요.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눈사람을 굴리는 재미에 시간가는 줄 모르고 놀다가 5살짜리 남동생의 손발이 얼어 어머니에게 된 꾸지람에 집을 나와 밖을 빙빙 돌다가 퇴근하는 아빠와 함께 들어가 욕을 면한 적도 있었습니다.

또한 군복무기간 눈이 내리던 날 밤, 강행군 와중에 눈에 젖은 발이 얼어 지금도 그 후유증으로 겨울이 되면 발이 시퍼런 색을 띠기도 합니다. 두 번 다시 돌아볼 수 없는 지나간 추억으로 잠시 잠깐 멍하게 서 있는 저에게 손녀가 다가와 손을 잡으며 왜 할머니 기운이 없는 가고 물어왔습니다.

집에 들어와 따끈한 물에 몸을 씻고 잠자리에 누웠건만 손녀는 밖에 있는 눈사람이 걱정되어 잠이 오지 않는다고 안절부절 못하는 걸 보고 우리 가족은 또 한 번 행복한 웃음을 지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잠자리에서 일어난 손녀는 주섬주섬 두터운 겉옷과 모자, 목도리와 장갑을 끼고는 출입문 앞에 서서 나가자고 졸라댑니다.

문을 열고 밖에 나오는 순간 깜짝 놀랐습니다. 주차장에 서 있는 모든 차들이 솜처럼 흰 옷을 입고 있었고 그야말로 주변의 모든 것들이 흰 눈으로 덮여있어 눈이 부셨습니다. 손녀가 밤에 만들어 놓은 눈사람 머리 위에 쌓인 눈을 장갑을 낀 조그마한 손으로 톡 톡 털어 주고 있는데 눈을 쓸고 있던 아파트 경비원 아저씨가 꼬마가 춥지도 않은 가고 물었습니다.

밤새 추운 곳에서 꽁꽁 언 눈사람이 불쌍하다고 하는 손녀의 말에 경비원 아저씨와 저는 또 한 번 웃었습니다. 북한 같으면 이렇게 많은 눈이 내리면 벌써 밤을 새워 가며 도로에 쌓인 눈을 치느라 인민반장의 불호령이 있으련만 이곳 한국에는 누구 하나 눈을 치우러 나오라는 사람은 없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