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생각 평양생각] 재봉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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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저는 재봉기술을 배우고 있습니다. 제가 이곳 한국에 처음 왔을 때 제 주변에 있는 친구들은 재봉학원에 많이 다녔습니다. 함께 학원에 다니자고 권고하는 친구들에게 저는 이 나이에 재봉을 배워 언제 써 먹겠냐고, 또 한국에는 재봉을 배워 봤자 아무런 쓸모가 없지 않느냐고 말했습니다. 왜냐면 이곳 한국에는 백화점은 물론 시장이나 대형 상점에 저렴한 옷들이 많아 철따라 새로 유행하는 옷을 골라 구입할 수 있어 재봉기술이 필요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때 친구들에게 괜히 시간을 헛되게 보낸다고 추궁했습니다. 60을 바라보는 우리 나이가 되면 재봉을 하던 사람들도 그만두어야 할 나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랬던 제가 지금은 재봉기술을 배우느라 세월 가는 줄 모르고 또 하나의 새로운 세계에서 사는 것만 같습니다. 정말 생각도 해보지 못했습니다만 애들도 가끔은 엄마인 저를 은근슬쩍 놀린답니다. 사실 저도 이미 오래전부터 재봉기술을 배우고 싶었습니다.

친구들을 놀린 지 8년이 지난 오늘 제가 재봉기술을 배운다고 하니 친구들은 오히려 저를 놀려대기도 합니다. 제가 북한에서 조금 할 수 있었던 '쌍마'나 '비둘기'라는 수동 재봉기와는 전혀 다른, 북한에서 흔히 말하는 전기 재봉이라 처음에는 조금 두렵기도 했고, 또 이 나이에 잘 하겠나 걱정도 해보았지만 한 뜸 한 뜸 배우다 보니 정말 신기하고 즐거웠습니다. 이제는 어느 정도 바느질은 자신이 생겼습니다.

어제도 저는 친구들과 함께 앞치마를 몇 개 만들어 다른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요새 한창 유행인 모자 달린 옷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재봉기에 앉으면 일어나기조차 싫을 정도로 즐겁고 매일매일 입고되는 기성복과 코트, 모자 달린 옷 그리고 젊은 여성들이 흔히 입는 반바지 하나에도 내 손길이 닿았고 시민들이 내가 만든 두툼한 옷을 입고 이 추운 겨울을 따뜻하게 보낼 수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뿌듯하기도 합니다. 한창 바쁜 저녁 시간, 다 만든 제품을 동대문 백화점으로 마무리해 보내고 퇴근길에 나섰습니다. 보슬비 내리는 쌀쌀한 거리를 걸으며 저는 언니 생각에 잠겼습니다.

고향에 있는 저의 언니는 바느질을 잘 했습니다. 집에서 개인 양복점을 차려놓고 정장과 저고리, 조선옷(한복)까지 모든 옷들을 주문받아 만들어주곤 했습니다. 바느질을 잘한다고 동네뿐 아니라 평양시에서도 소문이 자자했습니다. 한번은 제가 군에서 갓 제대하여 언니가 만들어준 예쁜 정장 옷을 입고 평양시가 좁다하게 활보한 적이 있습니다. 웬만한 옷 공장에서 제작해 만든 옷보다 더 예쁘고 특별했기에 친구들도 부러워했습니다.

해마다 당에서 진행하는 행사에는 고운 조선옷을 입어야 합니다. 그때에도 언니가 조선옷을 지어 주었습니다. 저는 언니가 항상 부러웠습니다. 그때 저는 재단과 재봉기술은 아무나 배우기 힘든 특별한 손재간과 기술로 생각했습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공급체제인 북한에서는 백화점이나 상점에서 천을 구입할 수도 없었지만 아이들의 예쁜 옷을 구입하기도 어렵습니다.

제가 갓 제대하여 고향에 돌아왔을 때에 어머니는 직접 구입해 장롱 속에 깊이 간직해두었던 질 좋고 예쁜 여름 원피스를 주셨습니다. 저는 큰 딸을 예쁘게 꾸며주고 싶어 그 원피스를 손에 들고 언니를 찾아갔습니다.

한창 주문이 바쁜 언니는 제 부탁을 거절했습니다. 저는 언니에 대한 실망과 서운함을 안고 친정집을 찾았습니다. 워낙 자존심이 강한 저는 그때 무조건 내 손으로 만들어 입히겠다는 마음으로 대충 종이 견본을 만들어 천위에 놓고 가위를 들고 대담하게 뭉텅뭉텅 잘랐습니다. 후에 알았지만 제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동생들은 가슴이 뭉클했다고 합니다. 그러고 나서 재봉기 씌우개를 벗기고 바느질을 했습니다. 시간이 지나 저의 첫 작품이 완성됐습니다. 얇은 여름 원피스 천이라 자꾸 밀려나는 것이 바느질하기에는 조금 힘들었지만 그래도 비슷하게 옷을 만들었습니다. 동생들은 제 딸에게 옷을 입혀 보면서 첫 작품 치고는 정말 괜찮다고 칭찬했습니다.

저녁이 되어 저는 딸애를 등에 업고 집으로 왔습니다. 남편은 못 보던 새 옷을 입은 아이를 보면서 상점에서 공급 받은 줄로 알고 있었지만 저는 저녁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직접 만들었다고 자랑했습니다. 은근슬쩍 남편의 칭찬을 기대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남편의 반응은 응당 여자라면 그런 손재주는 모두 가지고 태어나야 한다는 것처럼 '입힐 만하게 예쁘네.' 하고 퉁명스럽게 한마디 한 것이 전부였습니다.

말은 못했지만 그 때 저는 조금 서운했습니다. 하루는 남편이 엉덩이가 꿰진(터진) 작업복을 내놓았습니다. 조금 서운했던 그 때를 생각하면서 저는 바느질을 할 줄 모른다고 삐진 투로 말했습니다. 재봉바느질 잘하는 언니가 있는데 무슨 걱정이냐고 하는 남편에게 저는 고급 기능 재간을 가지고 있는 언니가 당신 꿰진 작업복을 가지고 앉아 있을 시간이 어디 있느냐고 퉁명스럽게 답했습니다.

그러나 남편이 출근한 뒤 저는 남편의 꿰진 작업복을 들고 앉아 손바느질을 했습니다. 그야 말로 군에서 꿰진 군복을 바느질해 입던 그 솜씨를 발휘했습니다. 퇴근해 집으로 돌아온 남편은 재봉 기술을 빌린 솜씨가 아니라 내 손으로 직접 바느질을 한 솜씨에 놀라 칭찬을 해주었습니다. 지금 저는 저의 재봉 솜씨를 제 언니에게, 그 때의 남편에게 보여줄 수 없는 게 안타깝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