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의 변화를 만끽하는 생활의 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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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까지만 해도 아름다웠던 단풍잎이 벌써 낙엽이 되어 떨어지고 앙상한 나무 가지에 남아 있던 마지막 은행잎이 가랑잎이 되어 땅에 떨어지는 모습을 보며 잠시 잠깐 누군가가 지은 시의 한 구절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봄날에는 새순의 생명을 주고, 여름에는 태양빛을 온전히 머금고, 가을엔 열매를 잉태하여 주고 그리고 제 할 일을 다 하고는 겨울엔 땅의 자양분을 위해 자기 자신을 내려놓는다."

시의 구절구절을 읽으면 읽을수록 마음 속 깊이 와 닿는 특별한 시의 내용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북한 주민 같으면 어려운 삶을 살아가는 것에 지쳐 생각조차 해볼 수 없는 것이지만 바람과 함께 소리 없이 떨어지는 낙엽을 밟으며 잠깐 지나온 삶을 돌아보니 그동안의 기쁘고 즐겁고 행복했던 시간과 함께 슬픔의 눈물과 마음 아팠던 시간들이 스쳐 지나갑니다.

순간 어려운 생활고를 이기지 못해 꿈과 희망을 포기하고 대동강 물에 뛰어 들어갈 생각을 했었고, 독풀로 인해 고통을 겪고 있는 어린 아들을 부둥켜안고 '왜 하필 내 가족이고 내 아들인가? 아들이 아니라 엄마인 나에게 차례질 것이지.' 당시에는 그저 하염없는 눈물만 흘려야만 했던 것이 안타까울 뿐이었습니다.

오랜 남한 생활에 익숙해 어느덧 남한 사람이 다 된듯합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아름다움의 자연 풍경 앞에서도 역시 여자의 마음을 생각하고 표현할 줄 알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떨어지는 낙엽 잎을 보면서도 살아온 삶에 대해 추억에 잠기는 것이 너무도 자연스럽고 여유로운 마음가짐으로 얘기할 수가 있으니 말입니다.

홀로 이런 생각을 하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데 "우리가 북한에서 태어났다면 이런 것도 먹지 못 할거 거든." 쫑알쫑알 말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옵니다. 돌아보니 개구쟁이 2명의 남자 꼬마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등에는 조금 무거워 보이는 책가방이 메여 있었고 각자 손에는 떡볶이가 들어 있는 종이컵을 들고 있었습니다. 매운 떡볶이를 먹어서인지 입술은 이미 빨개져 있었고요. 몇 살인가 물었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생이라 10살이라 하네요. 제 손자녀석 또래 들이라 마냥 대견하고 귀여웠습니다. 언제인가 북한에서 오신 선생님께서 북한 어린이들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고 하면서 부모님에게서 하루에 용돈 1,000원을 받으면 500원만 사용한다고 하네요. 나머지 500원씩은 돼지 저금통에 넣는다고 합니다. 통일되면 북한 어린이들에게 학용품을 사서 주겠다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순간 나 자신도 모르게 그 꼬마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습니다.

그러는 제 눈에서는 괜히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저 역시 꼬마 친구들에게 제 소개를 간단히 해 주었습니다. 길거리에서 잠시 만난 친구들이었지만 너무도 기특하고 대견스러움과 더불어 대들보와 같은 꼬마들의 야무진 꿈과 희망이 있기에 통일은 꼭 올 것이며 그날은 반드시 앞당길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꼬마친구들과 헤어지고도 아이들을 키우면서 용돈은 생각지도 못했으며 좋은 장난감 하나 제대로 구입해 주지 못하고 키웠던 지난날의 아픈 기억들이 생생이 떠 올랐습니다.

엄마의 아픈 마음을 헤아려 어린 철부지였던 아들은 작은 네모 칸에 두 글자씩 또박 또박 써내러 가던 모습을 보고 아이들이 잠든 깊은 밤에 홀로 눈물 흘렸던 시절도 있었거든요. 하기에 저는 우리 아이들을 키우면서 해 주지 못했던 원한을 손자 녀석들에게 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꼬마 친구들처럼 나 자신 뿐만 아니라 내 손자 녀석들도 용돈을 아껴 사용하는 좋은 아이디어를 알려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문뜩 들었습니다. 할미가 북한에서 왔다는 얘기를 듣고 충격을 받아서인지 하루 종일 새침하게 삐져 있던 손녀딸, 어느덧 시간이 지나 지난해에는 할미와 엄마의 고향이 평양이고 경제적으로 살기 어려워 이곳으로 왔다는 것을 이해하고는 사촌 동생들에게는 얘기하지 말고 비밀로 하자고 하던 손녀의 대견한 모습도 다시 한 번 새겨 보는 계기가 되기도 했거든요.

집에 도착해 학교생활과 학원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손녀 딸애와 전화로 통화를 했습니다. 오늘도 떨어지는 낙엽 잎과 어린 꼬마 친구들과 함께 지나온 내 삶의 추억을 해보았습니다. 서울에서 김춘애입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