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여성의 수기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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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저는 친구와 함께 한 탈북 여성이 쓴 수기 ‘나는 엄마다’라는 글을 읽으면서 손수건 한 개를 다 적실 정도로 눈물을 흘렸습니다. 자녀를 둔 우리 탈북 어머니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이런 생각과 함께 비장한 각오를 해 본 경험이 있습니다. 수기를 쓴 필자는 치마 자락을 잡고 엄마와 헤어지지 않겠다고 매달리는 어린 세 딸을 고향에 남겨두고 두만강을 건넜다고 합니다.

탈북자인 김씨가 북한 감옥에서 당시 2살된 아들과 겪었던 고초에 대해 증언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탈북자인 김씨가 북한 감옥에서 당시 2살된 아들과 겪었던 고초에 대해 증언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사진-연합뉴스 제공)

3개월만 고생하면 장사 밑천을 벌어서 돌아올 수 있다는 주변 사람들의 말에 비장한 각오를 하고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갔다고 합니다. 사람들로부터 듣던 얘기와는 전혀 다른 말도 통하지 않는 타향살이에 여기저기로 쫓겨 다니면서 2년만에야 겨우 손에 작은 돈을 쥘 수가 있어 어린 세 딸이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노력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고향으로 갈 여건이 안 돼서 할 수 없이 그만 이곳 대한민국으로 왔고 피타는 노력 끝에 3명의 자녀들을 모두 이곳으로 데려 왔으며 지금은 딸들이 모두 대학도 졸업하고 열심히 행복한 새 삶을 살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곳 남한이 고향인 한 친구는 어떻게 영화의 한 장면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일이 있었냐고 몇 번이나 되풀이해 말합니다. 허나 저에게는 전혀 남의 말이나 남의 얘기 같지 않았습니다. 저도 그와 꼭 같은 길을 걸어 왔으니까요.

당시 강을 건너 중국에 간 딸을 찾아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단순한 생각으로 그 누구도 알 수 없고 기약 없는 두만강을 건넜던 저 역시 딸은 찾지도 못한 채 2년이란 세월이 흘렀거든요. 큰 딸을 찾지 못한 채 자꾸만 흘러가는 시간이 조급하기도 했었지만 고향에 두고 온 다른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걱정으로 마음은 착잡했습니다. 그 와중에도 살아가려고 어린 철부지 딸과 함께 만평이나 되는 새 땅을 일구어 지은 옥수수나 콩을 가지고 평양으로 가려고 생각했던 경험이 있었습니다.

새로 일군 땅에서는 그야말로 수확이 컸습니다. 한해 여름 지은 식량을 가지고 고향에 있는 식량 공급소에 지원하면 당에서는 나를 용서해 줄 것이고, 또 내 가족을 만날 수 있겠지 하는 어리석은 생각으로 그런 엉뚱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중국공안에 붙잡혀 북한으로 강제 북송당한 경험이 없었다면 아마 지금까지도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만 강제 북송되어 인간으로서는 상상도, 생각도 할 수 없는 그야말로 짐승보다도 못한 굴욕과 모욕을 당한 저는 결심을 했습니다.

내가 여기서 죽지 말고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과 살아서 이산가족이 아닌 이산가족이 되어 슬픔과 아픔을 겪고 있는 내 가족을 찾아 무조건 한국으로 가야만 인간다운 새 삶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됐습니다. 결국은 내 스스로가 눈을 뜨게 되어 다시 탈북을 결행하고 한국에 오게 된 현실 그대로 곁에 있는 친구에게 얘기해 주었습니다. 제 얘기를 듣고 있던 친구는 텔레비전에서 증언하는 탈북자들의 얘기를 들으면서도 사실 믿기지 않았는데 어쩌면 그런 가슴 아픈 일을 겪었느냐고 하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친구는 본인도 나름대로 어린 시절 많은 고생으로 인해 상처가 많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내가 겪은 일에 비하면 본인이 겪은 일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저는 이곳 한국에 와 있는 탈북자들의 75%를 차지하는 탈북여성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겪는 일이고 또 그런 생각을 한 번쯤은 해 보는 것이 현실이라는 것을 덧붙여 얘기 해주었습니다. 그 친구는 이렇게 귀중한 친구가 제 옆에 있다는 것이 너무도 자랑스럽다고 말합니다.

그 필자의 주인공과 제가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필자는 홀로 이곳 대한민국에 와서 나중에 세 딸을 데려 왔다면 저는 중국에서 세 자녀를 찾아 이곳 한국에 함께 왔다는 것이 차이 날 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강한 엄마였기에 그런 무궁무진한 힘과 용기가 있지 않았나 생각 합니다. 우리 탈북 여성들은 강한 어머니였기에 물살 빠르고 깊고 무서운 두만 강물에 피눈물을 뿌리면서 여성으로서 인간으로서는 겪지 말아야 할 어려움과 시련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우리 대한민국 조국의 품으로 찾아올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해 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만약에 그때 제가 어리석은 생각을 버리지 않고 옥수수를 싣고 평양으로 갔다면 과연 쉽게 고향까지 무사히 갈 수 있었을까요? 또 북한 당국은 나를 용서하고 가족과 만나게 해 주었을까요? 아닙니다. 교두를 건너자마자 저와 딸의 양손에 족쇄를 채워 정치범수용소로 보냈을 것이고 식량은 모조리 회수했을 것이 뻔 한 일이거든요.

뻔 한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또 생각은 하면서도 헤어져 있는 가족과 내 자식 때문에 어리석은 생각을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중국을 비롯한 제3국에서 우리 선배들이 걸어온 길을 다시 걷지 않으면 안 되는 현실이 빚어지고 있습니다. 언제이면 이 참담한 비극이 없어지겠는지, 우리 탈북자들이 이런 두려움과 무서운 모험을 하지 않고 이곳 대한민국으로 올수는 없을까요?

내 고향 주민들도 인간다운 삶을 위해서는 홍콩이나 태국주민들처럼 대담하게 들고 일어나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날은 멀지 않았다고 감히 말씀드립니다. 서울에서 김춘애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