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생각 평양생각] 오두산 통일전망대를 다녀 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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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한 달에 한 번씩은 통일 전망대를 다녀옵니다. 지난주에도 오두산 통일 전망대를 다녀왔습니다. 관광차에서 내린 저는 친구들과 함께 개성공단에서 만든 제품이 진열돼 있는 기념관을 돌아보고는 지하 상점으로 내려갔습니다. 때 아니게 특별한 반팔 옷이 눈에 띠었습니다. 서울 시내에서는 볼 수 없는 조금 특별한 옷이었습니다. 앞가슴에는 호랑이 그림이 박혀 있는데 판매원의 말에 의하면 호랑이 그림이 있는 옷을 입으면 남자들이 기를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귀가 솔깃한 저는 전투기의 그림이 담긴 것과 호랑이의 그림이 있는 것 등 세 장의 옷을 골랐습니다. 양력설 명절에 찾아올 아들과 두 사위들에게 선물하고 싶어서였습니다. 그리고 사돈들에게 선물로 줄 40도짜리 북한 술 꼬냐크 2병을 구입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전망대에 올랐습니다.

초겨울 치고는 매우 강한 바람이 볼과 손발이 시릴 정도로 불어왔습니다. 순간 함박눈이 펑펑 내리다가 금세 멎고 강한 바람이 불어대는 그야말로 변덕스러운 초겨울 날씨였습니다. 세찬 바람을 못 이겨 두 손으로 볼을 감싸 쥐고 두 줄기의 강물이 하나로 합쳐져 흐르는 강물을 내려다보는 순간 마음이 뻥 뚫린 듯 시원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잠깐이었습니다. 워낙 흐린 날씨 탓에 4시가 조금 지난 시간이었지만 벌써 날은 어두워지고 있었습니다.

그날따라 관광 온 이들 중에는 중국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어렴풋하게 보이는 임진강 건너편을 바라보며 고향 생각을 하고 있는데 함께 간 친구는 옆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그 친구는 한국에 온지 이제 3년이 되었는데 전망대에는 처음 왔다고 했습니다. "지금쯤이면 밥을 짓느라 굴뚝에서 연기가 날 터인데. 연기도 없고 전기 불 켠 집도 보이지 않으니 혹시 모두 추위에 굶어 죽은 게 아니여? 저 벌거숭이산에서 무슨 나무를 해 땔감을 마련할 수 있을까, 저런 암흑 같은 세상에서 우리 어떻게 살았을까?

저 사람들은 우리 쪽을 매일 매일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남쪽 사람들이 잘 살고 있다는 것을 얼마든지 알고 있을 텐데 헤엄을 쳐서라도 오지."하는 두 친구의 말을 들으며 우리도 북한에서 살아 보았지만 가랑잎을 긁어서 땔감을 겨우겨우 마련하곤 했는데 무슨 연기가 날까, 그나마도 없어서 밥이나 겨우 지어 먹을 터인데 굴뚝으로 나올 연기나 있을까, 하고 말을 하자 한 친구는 헛웃음을 터뜨렸습니다.

고향이 황해도인 그 친구는 나무가 없어 겨울이면 볏짚 부스러기와 소나무 가래기를 긁어 불을 땠는데 연기가 생길 새도 없이 후다닥 타 버렸다고 했습니다. 농촌 문화 주택이었지만 밑불이 없어 밤 12시가 되기 전에 벌써 방은 얼음 덩어리처럼 차가워지고 벽으로는 황소 같은 바람이 들어와 이불 속에서도 손과 발이 시려 잠을 설친 날이 허다하다고 했습니다.

저 역시 평양에서 살았지만 석탄 공급을 제대로 해주지 않아 겨울이면 이불 속에서도 아이들 손이 빨갛게 얼어 있었고 아침에 일어나면 허리에서는 우직우직 소리가 났다고 했습니다. 한 번은 쓰지 않던 밥상을 다 쪼개 불로 땠고 남이 빚어 놓은 석탄을 훔쳐도 보았다고 말하자 모두 웃었습니다. 여기 대한민국에서는 서울뿐만 아니라 지방과 시골에서도 자원 봉사자들이 노인들과 장애인 그리고 일손이 부족한 집들에 연탄을 무료로 공급해 주고 있으며 지하철이나 길거리마다 그리고 TV 방송에서 불우이웃돕기 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그들의 따뜻한 사랑이 직접 내 마음에 와 닿는다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고향 생각을 하며 쓸쓸한 마음으로 다시 2층 문화 회관으로 들어가 탈북 예술단에서 준비한 공연을 보았습니다.

그들의 북한식 사투리가 섞인 노래와 춤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즐거워했습니다. 공연이 끝나고 우리는 버스를 타고 서울로 향했습니다. 버스 안에서 북한 실상에 대한 제 해설을 듣던 한 분이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북한에는 달리던 열차도 때와 장소에 상관없이 몇 시간씩 서 있고 추운 겨울에 땔감도 없다고 하는데 사실이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답해줬습니다. "지금은 한창 어느 집이나 저녁밥 준비를 하고 있을 시간입니다. 그런데 방금 여러분들이 전망대에서 쌍안경으로 북한쪽을 보셨지만 굴뚝에서 연기가 나는 것을 보신 분이 있습니까? 그렇다고 북한이 우리 대한민국처럼 전기밥솥으로 밥을 짓고 가스를 연료로 음식을 조리하는 가스레인지로 찌개와 국을 끓이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전기사정은 더 말할 수도 없이 열악하기 때문에 석탄을 때고 나무를 때야 합니다. 그러나 석탄도 나무도 거의 없습니다. 북한의 전기 기관차는 정전이 되면 산비탈이든 역이든 아무 때나 설 수 밖에 없습니다. 그나마도 전기가 약해 높은 둔덕을 오를 때면 속도가 약해지고, 화물자동차 역시 연료가 부족해 강냉이 속이나 나무를 태워 물을 끓인 증기를 만들어 운행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버스 안에서 제 말을 듣던 남한 분들은 놀라는 얼굴이었습니다. 저는 계속해서 평양시의 높은 고층 건물 역시 자주 정전돼 20층 심지어 30층도 계단으로 걸어서 출퇴근해야 하고, 평양시 수돗물 공급 역시 아침과 점심, 저녁에 한 시간씩 시간제 물을 공급해 준다고 말했습니다. 또 통일 거리와 버드나무 거리, 광복거리의 높은 아파트에는 수압이 약해 5층까지밖에 물이 나오지 않아 새벽마다 아래층에 사는 사람들과 위층에 사는 사람들은 물 때문에 싸움도 잦아진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농민 시장 옆에서 살았던 저는 여름철 더위에 시장 안에서 장사를 하던 사람들뿐만 아니라 길 가던 사람들과 먹을 물 때문에 여러 번 싸우기도 했다고 말했습니다. 여기 대한민국 국민들은 먹을 물 때문에 주위 사람들과 싸웠다고 이야기하면 믿기 어려워합니다.

한국에 와서 맨 처음 서울에 집을 배정받았을 적에 우리 아이들은 문을 열고 집에 들어가는 순간 수도꼭지를 틀어 보고 더운물과 찬물이 콸콸 나오는 모습과 목욕탕에 안 가도 매일매일 집에서 목욕을 할 수 있다며 너무도 좋아하던 모습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이 추운 겨울에도 우리 아이들은 집에서 반바지에 짧은 티셔츠를 입고 지냅니다. 버스 안에서 제 얘기를 듣던 남한 사람들은 설마 그러냐며 잘 믿지 않다가 얘기를 다 듣고는 하루빨리 통일이 되어 북한 주민들도 근심 걱정 없는 행복한 삶을 함께 누렸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대한민국에 와서 한겨울에 강한 바람이 불고 함박눈이 펑펑 와도 추운 줄 모르고 30도가 넘는 한 여름 삼복더위에도 더운 줄 모르고 먹을 걱정, 입을 걱정, 쓰고 살 걱정을 모르고 살고 있는 저는 오늘도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는 북한 주민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