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이맘때면 전철역에서 보게 되는 낯익은 특별한 사람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빨간 옷차림에 빨간 냄비를 앞에 걸어 놓고 작은 종을 든 손에서 울리는 종소리를 들을 수가 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과 어린이들이 빨간 자선냄비에 돈을 넣습니다. 불우 이웃 돕기 모금 운동인 자선냄비라고 합니다.
구세군 자선냄비는 연말에 실시되는 자선 모금 운동이며 모금된 성금은 어려운 사람들과 이재민 그리고 장애자와 독거노인, 소년소녀 가장들에게 쓰이고 있습니다. 자선냄비는 1891년 미국에서 처음 시작 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샌프란시스코 근교 해안에 배가 좌초돼 생긴 1000여 명의 난민과 도시의 빈민들을 위해 모금 활동을 하던 중 한 구세군 여사관이 쇠솥을 다리에 걸어놓고 "이 국솥을 끓이게 합시다"는 호소로 기금을 모으는 것으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그 후 전 세계로 퍼져 붉은 세 다리 냄비걸이와 냄비 모양의 모금통과 제복을 입은 구세군사관이 흔드는 손 종소리로 상징 되는 자선냄비는, 매년 성탄절이 가까워지면 이웃 사랑을 위한 모금 운동으로 전환되어 자리를 잡았다고 합니다. 현재는 100여개 국가에서 해마다 이맘때 성탄절이 다가오면 자선냄비의 모금 활동이 벌어지고 있다고 하네요. 이곳 한국에서도 1928년 12월 한국 구세군 사령관이었던 박준섭 사관이 서울의 도심에 자선냄비를 설치하고 불우 이웃 돕기를 시작 하였다고 합니다.
제가 처음 이곳 한국에 왔던 해, 첫 성탄절이 다가 오던 12월이었습니다. 당시 전철역에서 빨간 옷을 입은 어린 대학생 처녀가 종소리를 울리고 있는 모습이 많이 궁금했거든요. 더 궁금한 것은 지나가는 사람들과 어린이들이 빨간 냄비에 뭔가를 넣어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대학생에게 다가가 물어 볼 수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곳 남한 사람들과 말투가 조금 다른 차이점을 가진 저로서 또 하나원을 금방 나온 저로서는 다가 갈 용기가 나질 않았습니다. 개봉 전철역 역사를 나오다가 똑같은 대학생들이 빨간 옷을 입고 흔드는 종소리를 들었습니다. 궁금증을 참지 못해 지나가는 나이 많은 어르신을 세워 놓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날따라 날씨가 많이 추웠는데도 어르신은 싫은 내색 없이 어려운 사람들을 돕기 위한 모금 운동이라고 알아듣기 쉬운 말로 얘기 해 주었습니다. 지나오던 길로 다시 돌아서 전철 역사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지갑을 열어 보니 마침 만 원짜리 한 장이 있었습니다.
저녁을 먹고 텔레비전을 막 켰는데 불우 이웃 돕기 현황에 대해 나왔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내가 북한에서 받아 왔던 교육이 거짓이라는 것과 함께 자유민주주의에 대해 조금씩 알게 되었습니다. 추운 겨울이 되면 독거노인들이 추위에 떨지 않도록 연탄을 구입해 주고 겨울 김장 김치를 나누어 주고 한 해 농사지은 쌀을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써달라고 내 놓은 분들을 보면서 내가 먹고 쓰다가 남아서가 아니라 자신들은 절약 하고 아껴가며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봉사 하는 이곳 한국 사람들을 보면서 너무도 다른 북한사회와 비교해 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북한 주민들은 석탄 공급이 안되어 12월의 강추위에 떨고 있습니다. 하지만 북한 당국은 주민들에게 공급해야 할 석탄을 중국을 비롯한 다른 나라에 수출하고 있습니다. 평양시 시민들에게 한 달 석탄 공급량은 한 가구에 구멍탄 70덩이로 규정되어 있습니다. 1년 내내 기껏 석탄 공급은 겨우 1월 1일과 2월 16일 기준으로 한 가구당 30덩이 밖에 공급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나마도 버럭탄이라 화력이 전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거든요. 옷이란 옷을 다 껴입고 5식구가 한 이불 속에 모여 옹크리고 자도 빨갛게 언 작은 손을 입김으로 호호 불어 주던 그 시절. 추위에 우는 아이들을 껴안고 긴긴 겨울밤을 보내던 그 시절이 이제는 아련합니다. 내 고향 평양역과 전철역마다 어려운 사람들을 위한 불우 이웃돕기 자선냄비 종소리가 울려 퍼질 그날은 언제일까요. 서울에서 김춘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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