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의 적군묘지에 다녀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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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경기도 파주군 적성면 답곡리에 있는 적군 묘지를 다녀왔습니다. 몇 년 전에도 한 번 다녀온 경험이 있어 쉽게 찾았습니다. 적군 묘지는 북한군 묘역인 1묘역과 북한군 중국군이 함께 있는 2묘역으로 작은 밭 하나 사이로 나누어져 있거든요. 6.25전쟁 시기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싸웠고 또 지금 현재도 서로 총부리를 겨냥하고 있는 적의 유해를 안장한 적군 묘지는 세계적으로 우리 대한민국에만 있는 유일한 곳이라고도 합니다.

6,25전쟁 이후 전국에 있던 유해를 1996년 7월에 북한 땅과 가까운 이곳으로 옮겨 놨는데 군부대 군인들이 직접 관리 하고 있습니다. 죽어서나마 고향 땅을 가까이에서 바라보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오래전 얘기지만 이 적군 묘지는 우리 국민들의 적이기도 하지만 나라를 지키는 군인들에게는 서로 총부리를 맞대고 있는 철천지원수이기도 한데, 어떻게 군인들이 이 묘역을 관리하는 게 불편하지 않은 가고 질문한 적이 있거든요. 그때 한 장교로부터 이런 대답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한국군 장교는 그들도 고향이 있고 또 고향에서는 사랑하는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고 통일되는 그날 고향에 있는 가족들의 품으로 가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북한사회에서 살아온 저로서는 조금 놀랍고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뭔가 제 가슴을 펑 치는 것 같은 감동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이번에 제가 적군 묘지를 찾은 것은 그 때와는 달리 저에게 특별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김 아무개라는 아는 분을 찾고자 갔거든요. 북한에서 아내와 결혼식을 하고 열흘 만에 이곳 무장 공비조장이 되어 대원들과 함께 대한민국의 심장인 청와대 습격에 참가했던 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늘나라에 가 있는 그는 자신에게 사랑스러운 딸이 생겼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무장 공비가 되었고 지금도 평양에는 아버지의 얼굴도 모르는 딸과 예쁜 손자가 있거든요, 그리고 그는 공화국 영웅이 되었고 딸과 아내는 공화국 영웅의 가족으로 북한 당국에서 대우를 받고 살고 있으며 4,25군 명절이 되면 해마다 강원도의 어느 한적한 곳에 소지품만 묻어 놓은 묘를 찾아 갑니다.

이제는 오랜 세월이 흘러 아빠의 얼굴도 모르는 딸과 이제는 희미해지는 남편을 그리는 마음으로 1년에 한 번씩은 묘를 찾아가 제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고향이 함북도인 그의 고향에서는 고령의 나이가 된 늙은 노부모가 아들을 그리는 마음을 잃지 않고 살고 있습니다.

당시 그 중 나이 어린 한 사람이 죽기 살기로 도망쳐 살아서 북한으로 간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생사를 걸고 임무를 수행하고 부대로 돌아갔지만 자폭하지 않고 살아 왔다는 죄로 인해 결국에는 본인은 알지도 못하는 누명을 쓰고 이 세상 에 없는 몸이 되어 버렸습니다.

저는 이번 적군 묘역을 방문 하면서 사실 제가 찾고자 하는 분의 이름은 없었지만 생각이 많았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직사각형의 작은 대리석으로 된 비석에는 유해가 발견된 장소와 시기가 표시 되어 있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이름과 군사 칭호가 그대로 뚜렷이 적혀 있었습니다. 1묘역을 살펴보고 작은 밭 하나 사이를 지나 2묘역으로 갔습니다.

2묘역에는 6.25전쟁 당시 죽은 북한군과 중공군의 유해가 있었는데 중공군의 유해는 중국으로 송환된 것이 많았습니다. 유일하게 북한군의 유해만 남아 있었습니다. 이런 현실을 두고 북한당국에 대한 모멸과 내가 태어난 후 50년 동안 조국이라고 생각하고 자각하고 살아온 내 자신이 조금 부끄럽고 원망스럽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저로서는 조금 이해하기 어려운 생각이 듭니다만 북한군의 유해가 있는 비석위에는 꽃다발과 꽃송이도 놓여 있었고 또 어떤 이의 묘역 앞에는 커피 잔이 놓여 있었는데 마치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끈한 커피가 들어 있는 듯도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이 비를 찾아 꽃송이와 꽃다발, 커피 잔을 놓았을까하는 의문을 풀지 못한 채 같은 민족끼리 이런 가슴 아픈 비극을 겪은 역사와 아직도 가셔지지 않고 빚어지고 있는 비극적인 현실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습니다.

제가 찾고자 하는 그 사람은 당시 부상으로 병원에 입원해 사망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왜 이름이 없을까, 혹시 하는 생각과 더불어 저는 잠시 잠깐 북녘 땅을 바라보며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의 행복한 삶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북한당국을 원망하면서도 그리운 고향땅을 바라보았습니다.

서울에서 김춘애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