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은 5월이라 늦은 봄이지만, 요즘 한낮에는 초여름 같은 날씨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날씨가 더워서 버스나 전철 안은 물론 길거리에도 반팔 남방셔츠를 입은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여성들은 금방 날아갈 듯한 화사한 옷차림에 산다루와 끌게 신발을 신고 다닙니다. 저는 아침 출근시간이면 분주합니다. 더운 날씨라 얇은 여름 민소매 옷을 입어봤다가 아닌가 싶으면 벗고 또 다른 옷을 입어 보느라 바쁩니다.
주말에 서울 시민들은 가족과 함께 또는 연인과 함께 서울대공원이나 에버랜드 같은 놀이공원에 가느라고 서울을 빠져나가는 고속도로가 꽉 막히곤 합니다. 저도 역시 지난 주말, 놀러나가는 행렬에 끼어 큰딸과 함께 자가용 승용차를 타고 서해대교를 건너 당진을 지나 광진으로 갔습니다.
요즘 괜히 쓸쓸한 기분이 들어 점을 보기 위해 경기도 안중에서 출발해 약 1시간 남짓 거리에 있는 '성불암 심보살'이라는 점쟁이 집으로 갔습니다. 보살에게 인사를 하는 순간 평범하고 어수룩하게 생긴 40대 중반의 여자 보살은 제게 다짜고짜 여기에 왜 왔느냐고 말했습니다. 어리둥절해 하는 저의 모습을 보고는 꿈으로 자신의 운명을 해석할 수 있고 자기처럼 앉아서 남의 관상을 볼 수 있는 사람이 어째서 자기 집에 왔느냐고 말했습니다.
그제서야 저는 그 점쟁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갔습니다. 제 고모뻘 되는 사람이 옛날 조선 팔도에서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무당이었다고 합니다. 작두를 가지고 다니면서 화려한 옷을 입고 칼춤도 추고, 시퍼런 작두날 위에 올라 관상을 보곤 했었는데 무척 유명했다고 합니다.
그 보살이 신통하긴 하다는 생각을 하며 제 이름 석 자와 생년월일과 아들 이름과 아들의 생년월일 그리고 지금 재혼한 남편의 이름과 생년월일을 적고는 저는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고 무슨 말이 나오는가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신기하게도 그 보살은 제 과거의 일들 중에서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가슴아픈 일들을 줄줄 쏟아내는 게 아니겠습니까? 보살의 말에 마음 아팠던 기억들이 생각나 저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한참 동안 제 과거를 마치 곁에서 지켜 본 사람 마냥 얘기하던 그 보살은 지난 일보다 앞으로의 일이 궁금한 제게 몇가지 조언을 해줬습니다. 우선 제 건강상태에 대해 말하면서 돈을 아끼지 말고 꼭 병원에 가서 검진해 보라는 말을 해 주었고, 또 언제쯤이면 아들에게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는 것, 먼저 하늘나라에 간 남편이 생전에 아이들과 저에게 많은 죄를 지어서 지금 아이들을 잘 돌봐주고 있고 그로 인해 우리 아이들이 잘 되고 있다고 말을 해줬습니다. 보살 말로는 남편은 저 세상에 가서도 가족을 잊지 못하고 아이들과 제 주위에 맴돌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 관상쟁이의 말을 고스란이 믿느냐고 핀잔을 주는 사람도 있겠지만, 제겐 그 말이 사실처럼 느껴져 순간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마음이 슬프고 괴롭고 힘들 때마다 먼저 간 애들 아빠를 너무도 많이 욕했는데..... 그게 죄스럽고 미안하기도 했습니다.
여기 남한 사람들 중엔 점을 믿는 사람도 있고, 안 믿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는 점쟁이를 자주 찾아가는 사람은 아닙니다. 한국에 와서는 이번이 처음이고, 지난 시절엔 중국에 있을 때 한번 가봤습니다.
탈북한 뒤 중국에서 붙잡혀 두 번이나 북한으로 강제 북송됐다가 다시 탈북하면서 아이들과 뿔뿔이 흩어져 아이들 생사도 몰랐을 때 하도 답답해서 점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저는 중국 산동성에 있는 점쟁이를 찾아갔습니다. 그 점쟁이는 앞으로 아이들을 모두 찾을 수 있고 남쪽으로 내려가야지만 일이 잘 풀릴 수 있고 잘 살 수 있다고 했습니다. 또, 제 직업은 방송인 아니면 기자가 된다고도 했습니다.
저는 그 말을 곧이 곧대로 믿지 않았지만, 지금의 제 생활을 보면 그 점쟁이가 정말 신통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점쟁이에게 북쪽 고향 주민들의 미래는 어떤지, 언제쯤 가난과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지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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