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생각 평양생각]하나원 수료한 조카와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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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아침을 막 먹고, 설거지를 하려는 순간 손전화기가 울렸습니다. 마치 기다리고 있던 사람처럼 저는 재빠른 동작으로 전화기를 들여다보았습니다. 처음 보는 전화번호였지만, 혹시 하는 생각에 전화를 받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기다리던 조카였습니다.

20년 만에 들어보는 조카의 목소리였습니다. 조카는 울먹울먹하는 목소리로 하나원을 수료하고, 경상남도 통영에 집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저는 다급한 목소리로 주소부터 불러 달라고 했고, 조카가 불러주는 주소를 받아 적고는 이모가 당장 출발하겠으니 기다리라고 말하고, 급하게 전화를 끊었습니다. 하던 설거지도 까맣게 잊고, 출발 준비를 하고는 급히 컴퓨터를 켰습니다. 인터넷으로 버스 시간을 알아보고, 강남 고속터미널로 향했습니다. 강남 고속터미널에서 12시 50분에 통영으로 출발하는 버스를 탔습니다.

통영을 향해 달리는 버스 안에서 창밖을 내다보며 저는 고향 생각을 했습니다. 1992년, 그때 16살이었던 조카는 소년단 넥타이를 목에서 금방 풀어 놓은, 부모님 앞에서 한창 어리광을 부릴 나이였지만, 5군단 사격수로 뽑혀 군에 입대했습니다. 체격에 맞지 않는 군복을 어설프게 입었던 모습, 아직도 그 모습일까? 애교가 많던 언니를 닮았을까? 아니면 하루 종일 말 한마디 없던 재미없는 형부를 닮았을까? 이제는 어엿한 성인이 돼서 한 아이의 엄마가 된 조카의 모습을 상상해 해보았습니다.

5시간 걸려 목적지인 통영에 도착했습니다. 한국에서는 그 어디를 가나 그러하듯이 통영 시가지 역시 아담하고, 깨끗하고, 조용했습니다. 서울에서는 많은 눈을 볼 수 있었는데, 통영에서는 볼 수가 없었습니다. 겨울에 손에 꼽힐 정도로 눈이 내리지 않는 곳이 바로 통영이라고 합니다.

저는 택시를 타고, 조카가 알려준 주소대로 찾아 갔습니다. 버스터미널에서 불과 10분 거리도 안됐습니다. 몇 시간 걸려 찾아간 집은 문이 잠겨 있었습니다. 혹시 잘못 찾아온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에 함께 급히 전화를 걸었더니, 조카는 시청 노동부에 가 있다고 했습니다. 30분을 기다려서야 드디어 조카가 나타났습니다. 피는 속일 수 없다더니 조카는 신통하게도 형부의 모습을 그대로 빼닮아 있었습니다. 우리는 한참을 부등 켜 안은 채 울고, 또 울었습니다. 고향 소식이 몹시 궁금했던 저는 신발을 채 벗지도 않고, 언니와 형제들의 소식을 물었습니다.

우리 형제는 딸 6명에, 남동생이 한 명입니다. 다행히도 여자 형제들은 밥은 먹으며 근근이 살고 있다고 해서 안심이 됐습니다. 하지만, 군에서 제대하고 누나인 저를 찾으러 중국에 갔다가 한국 사람을 만나 도움을 받은 것이 죄가 되어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간 남동생의 생사는 깜깜무소식이라고 했습니다. 청진시 수송정치범 수용소로 갔을 거라는 짐작만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더 기가 막힌 말은 수송정치범 수용소에 있는 사람들은 영원히 나올 수가 없으며 유사시에는 인근에 있는 부대가 수송 정치범수용소를 폭파하여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을 무조건 죽이게 돼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고향 소식은 들어도, 들어도 끝이 없었습니다. 이제는 웬만한 평양시 주민들은 한국말을 따라 배우고 있다고 했고, 한국 드라마나 영화를 많이 보고 있다고 합니다. 조카도 시간만 나면 한국 드라마를 보았다고 했습니다.

조카는 3년 전부터 한국에 오기 위한 준비로 당 이동과 거주지를 반복해서 여러 번 옮기는 작업을 했다고 합니다. 평양에 있는 큰 조카 역시 한국 드라마를 보면서 아이들의 장래와 교육을 위해서는 무조건 한국으로 오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합니다. 너무도 많이 변해 가고 있는 고향 소식을 들을 때마다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다음 날 아침, 저는 조카와 함께 서울로 왔습니다. 북쪽 조카가 서울에 왔다는 소식을 들은 딸들과 사위들이 퇴근하자마자 집으로 왔습니다. 저 역시 그러했지만, 딸들과 아들은 조카의 고향 말소리를 들으니 고향 생각이 난다고 했습니다. 아들은 외사촌 누나인 조카의 말투가 이상하다고 놀리기도 했습니다.

음력설에 저는 조카와 함께 서울 상봉역에서 출발하는 새로 건설된 전철을 타고, 강원도 소양강 댐으로 갔습니다. 남춘천역에 내린 우리는 11번 버스를 타고 소양강댐에 올라갔습니다. 조카는 댐의 전경을 바라보며 강인지 저수지인지 알 수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배를 타고 댐을 건너갔습니다. 많은 돌탑에 돌을 한 개씩 올려놓으며 간절히 소원을 빌었습니다.

근처에서 우리는 빙어회를 먹었습니다. 워낙 고향에서부터 회를 좋아하던 조카는 맑은 공기 속에서 큰 저수지를 내려다보며 먹는 빙어회 맛은 별미라고 했습니다. 빙어회를 맛보고 우리는 춘천에서 유명한 막국수를 먹었습니다.

버스를 타고, 전철을 타고 오는 내내 저와 조카는 고향에 두고 온 가족들 얘기로 시간 가는 줄도 몰랐습니다. 저는 언니가 대한민국에 온다면 언니와 함께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도 가고, KTX 기차를 타고 부산에도 가보고, 그리고 일본과 미국에도 가보고 죽기 전에 원 없이 여행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서울에서 김춘애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