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생각 평양생각] 통행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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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정월 대보름날이었습니다. 저녁 밥을 먹고 설걷이를 하고 있는데 휴대전화 벨소리가 여느 날과 다르게 요란스럽게 울렸습니다. 젖은 손을 행주에 재빨리 문지르고 전화기를 들었습니다. 고향에 있는 동생의 전화였습니다.

동생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나는 전화기를 끄고 다시 번호를 꾹꾹 눌러 전화를 걸었습니다. 재차 들려오는 보고 싶고 그리운 동생의 목소리.. 얼굴은 볼 수 없지만, 전화로 목소리라도 가끔 들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저는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설 지난 뒤 정월 대보름 날이라 고향 생각으로 마음이 좀 쓸쓸하던 차에 걸려온 동생의 전화가 너무 반가워서 전화기를 들자마자 고향 소식부터 물었습니다. 부모님 산소가 있는 평양에는 다녀왔는지 물었습니다. 동생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이 통행증 때문에 갈 수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 놈의 통행증!' 한숨이 연거푸 나왔습니다. 저는 북한에서 살 때 통행증을 떼지 못해 지방에 살고 있는 부모님 생일이나 환갑 잔치에 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은 지방에 살고 있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얼굴도 잘 모르고 자랐습니다.

어느 날 지방에 있는 부모님이 딸 집이라고 오랫만에 왔는데 우리 아이들은 낯선 할머니가 주는 과자 조차도 선뜻 받지 않았었습니다. 죽기 전에 딸과 손자, 손녀들을 보고 죽겠다고 통행증 없이 우리 집에 오신 부모님이 하룻 밤이라도 편히 쉬고 가실 수 있도록 저는 담당 안전원에게 고급 술과 고급 담배를 바쳐야 했습니다.

겨우 몇 년 만에 모처럼 딸 집을 찾아온 부모님을 겨우 일주일간 평양 구경을 시킨 뒤 돌려보냈습니다. 간리역에 나가 배웅하면서 이제 헤어지면 정말 죽기 전에 다시 볼 수 없을 것 같았던 어머니, 아버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저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래서는 저는 아직도 통행증에 한이 맺혀 있습니다.

이곳 남한에서는 통행증이라는 것 없이도 그 어디든 마음대로 자유스럽게 갈 수가 있고, 자유롭게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날 수 있습니다.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널 수도 있으며, 열차와 고속버스를 타고 마음대로 육지를 활보할 수도 있습니다.

저는 이곳 남한에 와서 비행기를 타고, 포항에 다녀왔고, 배를 타고 백령도에도 다녀왔으며, 고속 열차를 타고 부산에도 다녀왔습니다. 김포 비행장에서 포항까지는 약 45분이면 갈 수 있고, 인천여객터미널에서 배를 타고 4시간 30분만 가면 백령도에 도착할 수 있으며, 고속열차를 타고 3시간 30분만 가면 부산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인천항에서 백령도까지는 2시간이면 갈 수 있지만, 북한 때문에 돌아가다 보니 4시간이 넘게 걸린다고 합니다.

남한에서의 자유로운 생활이 지속되면 지속될수록 '그 놈'의 통행증 때문에 부모님 생신에 찾아뵐 수 없었던 기억과 동생들의 결혼식과 부모님의 산소에도 마음대로 찾아갈 수 없었던 지난 날의 마음 아팠던 기억들이 떠오릅니다.

언제쯤이면 내 고향 사람들이 통행증 없이 동서남북 어디든 마음대로 다닐 수 있을까요? 언제쯤이면 남북이 하나가 되어 우리 탈북자들도 고향을 찾을 수 있을까요? 그 날이 멀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서울에서 김춘애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