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고 매웠던 겨울도 다 가고, 요즘은 제법 따스한 봄기운을 느낄 수 있습니다. 며칠 전에 저는 저녁을 먹고, 마을 공원에 나가 간단한 운동을 하고 집으로 들어와 텔레비전을 켰습니다.
마침 '해운대'라는 영화가 방송되고 있었습니다. 사납고 무서운 검푸른 바닷물이 큰 파도와 함께 밀려오고 있었고, 하늘에는 사람들을 구조하기 위한 헬기가 떠 있었습니다. 높은 건물 옥상에서 구조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무서움과 공포에 떨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 젊은 사람들은 어린 아이들과 나이 많은 노인들을 먼저 줄에 묶어 헬기로 올려 보냈습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사랑하는 가족과의 아픈 이별을 각오한 얼굴을 한 채 서로 부둥켜안고 울고 있었습니다.
비록 텔리비전에서 나오는 영화의 한 장면이었지만, 바닷물이 사람을 집어삼킬듯한 아슬아슬한 장면이어서 저는 방에 들어가던 자세 그대로 굳은 채 영화를 지켜봤습니다. 어느 새 사나운 폭풍이 지나가고, 바닷물 위로 둥둥 떠가는 물건들을 붙잡고 겨우겨우 지탱해 있는 사람들을 보며 고향에서 너무도 많이 보았던 현실을 눈앞에 보는 듯 했습니다.
제 옆에서 영화를 보던 조카도 전선대(전봇대)에 의지한 채 매달려 있는 사람들을 보며 불 보다도 물이 무섭다는 것을 군에서 직접 목격했다고 말했습니다. 북한에 있을 때 어느 여름 장마철에 큰 산사태로 한 개 여성 대대가 휩쓸려서 모두 죽었다고 했습니다. 산기슭에 자리 잡고 있던 대대 군인들은 한밤중에 일을 당해 미처 깨어나지도 못한 채 흙더미에 묻혔다고 했습니다. 단 3명이 살았는데, 그들은 전선대에 매달린 채 사흘을 보냈다고 했습니다. 굵은 전선대를 얼마나 꼭 끌어안고 있었는지 손이 굳어져서 겨우 폈다고 했습니다.
2002년에는 평양 시내 중심에 있는 옥류교 위를 달리던 버스 한 대가 대동강 물속으로 빠졌다고 합니다. 그 날 아침, 당 생활총화에서 비판을 받아 기분이 언짢았던 젊은 운전기사는 60명을 태운 버스를 몰고 가다 그만 사고를 내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버스가 물속에 잠기면 문이 열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운전기사는 순간적으로 버스 문을 열었고 당시 대동강 근처에 있던 평양산원 구급차들이 모두 출동했지만, 버스 문을 열고 나온 사람들이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다 안타깝게도 구조되지는 못했다고 합니다. 한국 같았으면 그 사람들이 모두 죽지 않고 살았을 것이고, 또 조금만 노력해도 살릴 수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죽었다는 얘깁니다. 이로 인해 주민들 사이에서는 얼마든지 살릴 수 있었던 사람들을 그냥 죽게 했다는 유언비어까지 돌았다고 합니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외화벌이를 위해 서해 바다에서 물이 나간 틈을 이용해 많은 사람들이 조개를 캐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날따라 안개가 많이 낀 상태라 정신없이 조개를 캐던 사람들은 물이 들어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하고 계속 조개를 캤다고 했습니다. 뒤늦게 물이 들오는 것을 알았는데 때는 이미 늦었고, 작은 배에 열다섯 명 정도가 매달렸다고 합니다. 군인들은 배가 뒤집힌다며 매달리는 사람들 중에서 나이 많은 사람들을 향해 이젠 그 만큼 살았으면 죽어도 아깝지 않다며 나이 많은 사람들을 물속으로 밀쳐냈다고 합니다.
비록 영화의 한 장면이었지만, 그 위험한 순간에도 어린 아이들과 나이 많은 노인들을 먼저 살리겠다고 밧줄에 묶어 헬기로 올려 보내고 자기보다도 사랑하는 가족과 남을 먼저 생각하는 한국, 반면에 조금만 노력하면 얼마든지 살릴 수 있었던 생명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죽게 하는 북한, 너무나 대조적인 현실을 보면서 조카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조카는 한국에 오기 전에도 한국 드라마 '겨울연가' '8월에 내리는 눈' '쩐의 전쟁' 등 드라마도 많이 보고, 한국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들어보기도 했는데 사람들이 사는 현실 그대로를 표현하기 때문에 비록 영화의 한 장면과 노래 한 소절의 가사 내용이라도 마음 속 깊이 쏙쏙 들어올 뿐만 아니라 감정 그대로를 느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저 역시 평양을 떠나 대한민국에 와서야 알았지만, 저의 반평생을 속고 살아온 것을 생각하면 너무도 허무합니다. 늦게나마 대한민국에 와서 저는 인간의 생명을 그 무엇보다도 귀중하게 여기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도 알았고, 누구를 사랑하는 마음도 알게 됐습니다.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이 보았고 누군가를 위해, 또 나를 위해 즐거운 인생을 만들어가며 살아가는 방법도 알게 됐습니다.
서울에서 김춘애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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