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친구의 딸 결혼식에 참가 하기 위해 김제를 다녀왔습니다. 신부 측이 서울에서 살고 있지만 신랑이 군인이다 보니 김제에서 결혼식을 하게 됐습니다. 이곳 한국에서는 서울이든 지방이든 편하고 자유롭게 오고 갈수 있고 또 결혼식 예식장 역시 도시든 지방이든 전혀 다르지 않거든요.
신랑 측에서 관광버스를 2대를 예약해 저는 친구들과 함께 아침 일찍 신부 집에 도착해 관광버스를 타고 서울에서 9시에 출발했습니다. 신부 측에서는 아침 식사를 하지 못한 하객들을 위해 미리 따끈한 떡과 과일과 음료수를 준비해 나누어 주었습니다. 마치 관광 가는 기분이 들기도 했습니다만 친구들은 설레는 마음들을 금치 못해 했습니다. 결혼식 시간은 1시 30분으로 예정되어 있었고 하객들을 실은 버스는 시간보다 일찍 도착해 점심식사를 했습니다.
뷔페 식사였는데 전라도에서 빠질 수 없는 홍어회가 있었습니다. 홍어를 삭혀 만든 음식이었는데 처음 보는 친구들은 그냥 일반 회 인줄 알고 입에 넣었다가 도로 뱉어 버리는 친구들도 있었고 코가 뻥 뚫려 감기가 다 날아갔다는 친구들도 있었습니다. 별미의 음식을 맛나게 먹고 드디어 시간이 되어 예식장으로 올라갔습니다.
저도 이곳 한국에 와서 두 딸을 결혼을 시켰기 때문에 남들과 똑같은 결혼식이겠지, 하는 생각으로 예식장에 들어서는 순간 예사롭지가 않은 분위기에 조금 뭔가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여러 명의 학군단 군복을 입은 군인들이 번쩍거리는 긴 칼을 들고 우렁찬 구령소리에 맞추어 연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때에야 바로 신랑이 군인 대위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예식을 진행하는 사회자 역시 군인이었는데, 사회자는 인사말에서 군사 칭호는 소령이고 신랑은 후배라고 합니다. 군인의 결혼식이라 뭔가 다르긴 달랐습니다. 사회자 말투 역시 절도와 패기가 가 있었습니다. 주례는 국회의원이었습니다.
다른 행사과정은 다른 결혼식과 같았는데 제일 재미있고 즐거운 시간이었던 것은 신랑 신부 퇴장 순서였습니다. 처음에는 그냥 신랑 신부를 퇴장 시켰는데 이렇게 신랑 신부를 쉽게 보낼 수는 없다고, 연습이었다면서 “다시 돌아서서 자기 위치로” 하고 구령을 줍니다. 신랑 신부는 다시 자기 위치로 돌아와 서자 ‘신랑 신부 퇴장’ 하고 구령을 주니 두 줄로 마주 서있던 군인들이 칼로 길을 막아 나섰습니다.
한명의 대원이 사랑의 표현으로 진한 키스를 요구하자 신랑은 잽싸게 신부의 볼에 입을 갖다 댑니다. 두 번째 군인이 신부에게 신랑한테 사랑을 고백하라고 하자 신부는 행동으로 표현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대신 신랑에게 현수를 요구하고는 신부의 목소리가 커질 때까지 신랑은 엎드려 현수를 연속합니다.
세 번째 대원들이 막아선 위치에서의 장면을 보는 순간 많은 사람들이 폭소를 터뜨렸습니다. 저 역시 이곳 한국에 와서 많은 결혼식에 참여 해 보았지만 군 결혼식은 처음 경험 해 보는 것이라 너무도 멋진 결혼식이 아닌가 생각을 하고 있는데 옆에 앉아 배를 그러안고 웃고 떠들던 친구가 눈물이 다나온다고 합니다.
친구들은 하는 말이 예쁘고 흰 웨딩드레스를 입고 다시 한 번 결혼을 해 보았으면 하고 말했습니다. 신부의 어머니는 눈에서 눈물을 보입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제 마음은 찡해 왔습니다. 저도 두 딸의 결혼 예식장에서 지나온 수많은 가슴 아팠던 상처로 인해 많은 눈물을 흘렸거든요,
예식을 마치고 버스를 타고 오면서 저는 신부의 어머니에게 집에 앉아서 딸을 뺏기는 것도 마음이 아픈데 김제까지 가서 딸을 뺏기고 오는 그 심정 얼마나 아플까 하고 말했습니다. 저 역시 이곳 한국에 온지 얼마 안 되어 큰딸 결혼식을 했었는데, 전라도 화순에 가서 결혼식을 한 경험이 있어 그 심정을 누구보다 이해하거든요.
버스를 타고 오는 내내 친구들은 버스에서 노래 부르고 춤을 추면서 딸 결혼식을 축하 해 주었습니다. 옆에 앉아 묵묵히 친구들이 부르는 노래와 춤 장단에 맞추어 박수를 열심히 치고 있던 한 친구의 눈에서는 눈물이 주르르 흘러 나왔습니다. 고향에 두고 온 딸 때문에 마음이 아프다고 합니다. 딸 결혼식도 참석하지 못했는데 태어난 손자들의 얼굴도 모른다고 합니다.
몇 년 애쓰던 끝에 찾아 작년 말에 돈을 조금 보내 주었다고 합니다. 두 손자가 있는데 한명은 5살이고 한명은 이제 갓 태어났다고 합니다. 너무도 가슴 아파하는 친구의 손을 꼭 잡고 이 비극 같은 현실이 없어질 그날도 머지않았다고 위로했습니다. 서울에서 김춘애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