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구정명절 가족들과 함께 파주 통일로 주변에 있는 심학산을 다녀왔습니다. 이날 일찍 새벽에 성당을 찾은 저는 먼저 간 분들을 위한 미령 미사에 참가해 하늘나라에 있는 부모님에게 설 제사를 지내고 아침 준비를 서둘렀습니다. 미리 해놓은 아침 식사를 마친 후 우리 가족은 내 고향이 제일 가까운 임진각으로 갔습니다. 마침 날씨는 따뜻한 봄날 같았습니다.
그리운 고향을 지척에 두고 한 번 가고 싶은 마음이 그렇게 간절하지만 갈 수 없는 고향땅을 바라보고 있자니 불효자식을 그리며 눈을 감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신 부모님과 형제들에 대한 그리움이 하염없이 밀려옵니다. 임진각 통일대교에서 평양까지의 거리는 208Km라고 씌어 있는 이정표를 보는 순간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나 자신도 모르게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리기도 합니다.
이 할미의 속마음을 알래야 알 수 없는 손자들은 임진각의 넓은 공간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좋아라 뛰어다닙니다. 큰 손녀 딸애는 북한으로 보내는 풍선을 이곳에서 할머니와 함께 날렸다고 자랑도 합니다만 우리 가족들은 철길을 바라보며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한 참 말이 없이 서있었습니다. 사위들도 이정표를 보니 장모님의 고향에 가보고 싶은 생각이 더더욱 간절해진다고 합니다.
저는 천천히 고향에 대한 자랑을 시작했습니다. 평양에도 이곳 서울처럼 도시 한 가운데 대동강 물이 흐르고 80년대 초 빙상관과 체육관이 건설되어 지금은 그곳에서 모든 경기를 진행하고 있지만 제가 어린 시절에는 빙상관이 없었기에 겨울이 오면 대동강이나 보통강에 서 스케이트 경기도 하고 친구들과 함께 눈싸움도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었다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리고 봄이 오면 모란봉에는 살구꽃과 벚꽃이 만발해 이곳 서울의 남산 못지 않다고 얘기하면서 한창 무더운 여름에 모란봉 청류봉에 올라서면 시원한 대동강 바람이 불어와 더운 줄 몰랐다고 자랑했습니다. 청류봉 나무 그늘에 깔개를 깔고 앉아 아이들과 함께 김밥도 먹었고 옥류관과 모란 각에서 쟁반 냉면을 먹던 얘기를 들려주기도 했습니다. 사위들은 통일이 되면 누구보다도 먼저 평양으로 가자고 합니다.
저는 가족들과 함께 프로방스라고불리우는고급식당을 찾았습니다. 구정 명절이라 긴가 민가 하는 생각을 가지고 들어갔지만 마침 영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큰 손녀 딸애는 한번 갔던 경험이 있는지라 좋아라 손뼉을 치며 사촌들에게 자랑을 합니다. 사위와 작은 딸은 이런 좋은 곳을 어떻게 아는 가고, 하여튼 우리 엄마는 모르는 곳이 없고 안 가본 곳이 없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조금 늦은 점심식사를 하고 우리 가족은 프로방스와 조금 떨어진 심학산으로 갔습니다. 심학산은 해발 192m되는 그리 높지 않은 작은 야산이었으며 바로 자유로 주변에 있습니다. 산봉우리 첫 머리가 중국을 향해 있다고 합니다. 산 정상에 오른 우리 가족은 정자에 올라 유유히 흐르는 한강 물과 출판단지와 인천 대교와 강화도를 한 눈에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의 마음을 설레게 한 곳이 있었습니다. 북한에 있는 송악산이 한눈에 안겨 왔습니다. 아주 가깝게 마치 손을 뻗치면 닿을 것 같이 보였거든요, 순간 저도 모르게 다시 한 번 고향의 대한 그리움을 달래면서 저도 모르게 나이가 들어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새삼 해 보았습니다.
지난날에는 잘 몰랐었는데, 최근에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부모 형제들에 대한 그리움이 간절해지는 순간이 잦아지는 것 같습니다. 하기에 지난 구정 설에도 임진각을 찾지 않았나 합니다. 우리 가족은 심학산 정상에서 각자의 올해 소원을 빌었습니다. 저는 올해에도 우리 가족이 건강하여 하고자 하는 일과 하고 싶어 하는 일이 잘되길 진심으로 기원했고 내 고향에 갈 수 있는 그날이 하루빨리 오게 해 달라고 빌었습니다.
집으로 오는 내내 저는 운전하는 아들의 늠름한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면서 지그시 눈을 감고 통일되는 그날 내 고향 평양으로 달려가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습니다. 자가용 승용차 다섯 대가 한 줄로 평양으로 달려갑니다. 맨 앞차에는 아들과 제가 타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고향에 도착하자 제일 먼저 형제들이 달려 왔었는데 부모님이 없는 그 자리에 부모님 대신 언니가 맨발로 두 팔을 펴고 맨 앞에서 달려옵니다. 지금은 성인이 된 조카들이지만 어린 모습으로 달려와 우리 가족이 타고 간 자가용 승용차를 타보기도 하고 만져보기도 합니다. 아들은 차 트렁크에서 갖가지의 과일과 음식을 내려 한 보따리씩 안겨 줍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손녀딸애가 제 팔을 흔들어 깨우며 할머니 무슨 꿈을 꾸었는가 하고 물어 옵니다. 환상 속에서 개어난 저는 꿈이 아니라 할미가 그리운 고향에 잠간 다녀왔다고 덧 붙였습니다. 그러자 고향이 어딘 가고 되물어 왔습니다. 그냥 먼 곳이라고 했습니다. 아직 어린 철부지 손자들에게 고향이 평양이라는 말을 당당하게 할 수 없는 마음이 아픕니다.
서울에서 김춘애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