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웠던 긴 겨울도 훌쩍 지나가고 어느새 강남 갔던 제비들도 돌아온다는 봄이 왔네요, 강물위에는 언제 얼음이 꽁꽁 얼었던가 싶습니다만 벌써 햇볕이 따스한 양지에는 냉이와 달래 잎이 파릇파릇 돋아났어요. 봄 하면 또 여성들이 좋아하는 계절이기도 합니다. 벌써 여성들의 봄옷 차림으로 거리는 화사해집니다.
비록 나이는 조금 있지만 우리 한국에서는 60이 청춘 90이 환갑이라 제 나이 역시 한창 중년 나이 여성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조금 웃기는 얘기지만 아침마다 옷장 문을 열고는 고민이 여느 때보다 많아져 외출 준비 혹은 출근시간이 늦어지는 것이 일쑤거든요. 무슨 옷을 입을까, 이 옷을 입고 거울 앞에 서면 아니고 또 저 옷을 입어 보면 또 아니어서 여러 번 반복하다 보며 때로는 어린 손녀딸한테 놀림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이런 제 모습 앞에서 때로는 지나간 추억을 해 보기도 합니다. 지난 날 고향에서는 4계절 바꿔 입을 옷 한 벌이 제대로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면서 값나가고 좋은 옷들은 모두 식량과 바꾸기도 했었거든요. 하기에 옷은 계절마다 단벌이라 골라 입을 옷도 그리 많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다 평양 시민들은 출근할 때 옷차림에 관한 규정이 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옷차림에 제약이 많았거든요. 바지도 입을 수 없고, 무조건 치마를 입어야 하기에 긴 양말을 신어야 하는데 요즘처럼 쌀쌀한 봄바람에 아래 내의를 입고 그 위에 양말을 신었습니다. 내의 위에 긴 양말을 신었으니 종다리는 그야말로 뱀이 알 가진 것처럼 울퉁불퉁 볼품이 없었답니다. 그러면 보기 흉한 모습이라고 학생 규찰대에게 단속도 여러 번 당했습니다. 지금은 봄바람을 꽃샘추위라고 참 이름도 예쁘지만 그때에는 봄바람이 왜 그리 추웠는지 지금 생각해 보면 조금은 허무합니다.
또 봄 하면 국제 여성 명절이 있습니다. 저는 며칠 전에 한국에 와 있는 프랑스대사를 만난적이 있습니다. 3.8 국제 부녀절을 맞으며 북한 여성들의 인권문제에 대해서 얘기하던 중 마음이 아프기도 했습니다. 프랑스 대사는 북한에서 여성들의 지위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참석자 중 어린 한 친구는 지금 북한 남성들의 지위는 가정에서는 아무런 권리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직장에 출근해보아야 식량공급도 월급도 없어 가정에서는 여성들이 장사를 비롯한 모든 생계를 책임져야 하기에 남편들은 그냥 집지키는 멍멍이라고 말합니다. 지금은 이곳 한국에 와서 대학을 다니고 있지만 고향에서는 비록 나이가 어린 철부지였지만 본인이 보기에도 아버지의 힘없는 어깨를 보면 마음이 아팠다고 합니다.
우리 대한민국에는 지금 대통령도 여성이고 국회의원들 속에서도 여성들이 많지만 북한의 최고 인민대의원회의 좌석에 앉은 사람들은 남자들이 대다수이고 혹 여자들이라면 백두산줄기라고 얘기 했습니다. 그리고 세포 비서나 작업반장 혹 직장장 중에 여성들이 있고 드물게는 평양 방직 공장 초급당 비서가 여성인데 그런 인물은 정말 드문 일이라고 얘기하면서 저는 북한에서는 부부싸움에서 여성이 남편에게 죽도록 매를 맞아도 개입을 할 수가 없다고 덧붙였습니다.
요즘 북한 당국에서는 여성들을 위한 무슨 법을 내놨다고 합니다. 이제 하나원을 갓 졸업한지 한 달도 안 되는 그야말로 때 벗이를 아직 하지 못한 한 친구는 고향이 혜산이라면서 여성들을 위한 법이 나온 지도 그런 법이 있는지도 몰랐다고 말합니다. 제가 한 마디 또 거들었습니다. 북한 주민들은 오직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의 말이 곧 지상의 명령이고 법이기 때문에 여성들을 위한 좋은 법이 나왔다는 것을 알려 주지도 않을 뿐 더러 또 주민들은 먹고 사는 것에 매달리느라 관심조차 없다고 말해주었습니다.
그 친구는 북한 주민들의 생활을 보면 도시주민 외의 시골사람들은 그야 말로 남 아마존 사람들의 사는 모습과 별로 차이가 없다고 말합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저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모성 영웅 칭호를 준다고 해도 북한 여성들은 출산을 잘 하지 않거든요.
아이를 많이 출산 한다고 국가에서 남들보다 식량 공급을 더 주는 것도 아니고 또 그렇다고 월급을 더 주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열악한 환경 속에서 아기를 키울 수가 없습니다. 또 지금 북한 어린이들 속에는 고아들이 수없이 많다고 하면서 부모들이 없는 그 어린 학생들은 추운 겨울에 산에 가서 나무를 해다가 시장에서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일이라 생각한다고 합니다.
저는 그 친구의 얘기를 들으면서 우리 아이들에게 흰 쌀밥 한 그릇, 돼지고기 국 한그릇 배불리 먹이는 것이 소원이었던 지난날 고향에서의 가슴 아팠던 시절을 잠시 생각해보았습니다. 여성이라고 하면 앞치마를 두르고 부엌에서 음식 냄새를 풍기며 만든 푸짐한 밥상을 사랑하는 내 가족들에게 차려 주고 그 음식을 맛있게 먹어 주는 가족들의 행복한 모습에서 아내로서 엄마로서의 사명감과 여성으로서의 행복을 느끼는 게 아닌가 하고 늘 생각했었거든요.
고향에서는 이런 소망과 꿈이 이뤄지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그 꿈을 실현해 보지 못했습니다. 조금 늦은 나이가 됐지만 저는 이곳 한국생활에서 요즘 그때의 소망과 꿈을 이루고 있습니다. 지난 3.8부녀절에도 비록 서툴기는 하지만 소갈비 찜에 아들 회사에서 추석 선물로 가져온 제주도 은갈치 조림과 갖가지 달래와 냉이를 새콤달콤하게 무쳐 놓은 밥상에 빙 둘러 앉아 수다를 떨며 식사하는 내 가족을 보며 저는 마냥 행복하고 뿌듯했습니다.
이것이 여성이라면 누구나 아내로서, 엄마로서, 가정주부로서의 진정한 행복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서울에서 김춘애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