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들은 ‘먼저 온 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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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은 봄, 화창한 4월이 왔네요. 지난 주말은 정말 여느 때 없이 화창했습니다. 워크숍에 함께 참가한 친구와 함께 아침 일찍 일어나 편안한 옷차림으로 참회속죄의성당 뒷산 산들래길을 걸었습니다. 맑은 아침 공기를 시원하게 마시며 어느덧 정상에 올랐습니다. 벌써 양지쪽에는 개나리꽃이 활짝 피어 있었고 진달래 꽃망울은 당장 터질 것만 같았습니다.

남들 보다 조금 일찍 진한 핑크색 진달래꽃이 드문드문 피어있었는데 따사로운 아침 햇살에 비쳐 더욱 아름다웠습니다. 그리 높지 않은 정상이었지만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났습니다. 정상에 오른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임진강과 한강이 합쳐지는 넓은 강이 시원하게 바라보이기도 했습니다만 저 멀리 고향이 바라보였거든요. 고향을 바라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가슴이 뭉클해지기도 했습니다. 고향을 떠나온지도 벌써 수 년이 흘렀지만 언제 한번 고향을 잊은 적 없습니다.

고향하면 누구나 다 그러하겠지만 빤히 바라보이는 고향을 두고도 자유롭게 갈 수 없는 것은 물론, 전화조차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곳이 바로 내 고향이라고 생각을 하니 더더욱 마음이 짠해 옵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남다르게 측은하게 보이는 40대의 젊은 친구 한명이 눈에 들어 왔습니다.

평양이 고향인 그 친구는 멀리 고향을 바라보며 눈에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독일 유학생으로 있다가 탈북해 이곳 한국에 온지 5년된 친구라고 합니다. 별로 말수가 적은 그 친구는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이곳에서 처음 적응하는 것이 너무도 어렵고 힘들었다고 하네요. 지금은 남부럽지 않은 공무원 직업이지만 때로는 작은 고시원에서 라면 한 개를 가지고 생활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같은 고향 친구인 저는 그 친구와 고향 얘기로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하나원을 졸업하고 파주로 배치 받아 왔었기에 그 친구는 파주가 제2고향과도 같다고 합니다. 어렵고 힘든 일이 생기거나 슬프고 마음이 아플 때면 이 산들래길을 걸어 정상에 올라 고향을 바라보며 마음을 달래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곳에 올라오면 이상하게도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한다고 하네요. 이번에도 이곳에 올라 좋은 기획프로그램 2가지를 성공했다고 합니다. 저는 그 친구의 얘기를 들으며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는 순간 남의 일 같지가 않았지만, 홀로 외로움과 어려움을 이겨 내며 열심히 성공한 그 친구의 말에서, 아직도 변하지 않은 구수한 평양 사투리가 친근하게 들려오면서 오랜 친구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자기를 낳아주고 키워주신 부모님과 형제들이 있는 고향을 빤히 바라보면서도 갈 수 없는 아픔을 두고 살고있는 그 친구는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닐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어느 때인가는 한강에 뛰어 들어가려고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발닿는 곳으로 간다는 것이 바로 이곳 참회속죄의성당을 찾았고 이곳 산들래길을 걸어 정상에 올라 고향을 바라보며 고향에 계시는 부모님과 약속을 하면서 굳은 마음가짐을 했다고 하네요.

이곳 파주가 고향인 친구는 우리 탈북자들을 만나보는 순간부터 놀란 것은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조금씩 정도 차이는 있지만 나름대로의 마음의 상처가 다 있다고 하면서 함께 마음 아파했습니다. 산들래길을 걸으며 진달래꽃과 개나리꽃에 맑은 아침 공기를 마시니 아침밥은 그야말로 여느 때 없는 별맛이었습니다.

아침식사 이후 따끈한 커피 한잔을 마시며 야외 만남의광장으로 갔습니다. 따사로운 아침 햇살이 너무 좋았습니다. 열심히 노력하면 하는 것만큼 내 것이 되는 이곳 자유민주주의 나라 한국에서 열심히 노력하며 새 삶의 인생을 살고있는 우리 탈북자들의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가 소중하고 귀중함을 알게 됐습니다.

어느 지인은 저에게 “우리 탈북자들은 먼저 온 미래”라고 말해주었습니다. 맞습니다. 먼저 온 통일의 선구자로서 다가오는 통일을 대비하는데 있어서 우리의 위치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확인하는 계기가 된 이번 1박 2일 워크숍이 저에게는 정말 잊혀지지 않을 좋은 추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면서 서울에서 김춘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