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속박물관대학에 입학하고 나서

서울 종로구 삼청로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열린 벼타작 체험행사에서 어린이들이 개상에 자리개질을 하고 있다,
서울 종로구 삼청로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열린 벼타작 체험행사에서 어린이들이 개상에 자리개질을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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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남한의 국립민속박물관이 운영하는 민속박물관대학에 입학한지도 벌써 한 달이 지났습니다. 이 대학은 그리 큰 대학은 아니지만 우리나라 역사와 문화를 배운다고 생각하니 모든 것이 새롭고 뿌듯합니다. 사단법인 민속박물관회는 국립민속박물관과 함께 공동으로 해마다 민속박물관 대학을 개설하고 있습니다. 이 대학에서는 우리나라 역사와 민속학 등 한국의 전통문화에 대한 강의와 현장답사를 통해 역사와 문화를 보다 깊이 알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역사와 문화의 현장들을 찾아 발로 뛰면서 연구하고 논문을 많이 발표한 이름있는 교수와 박사님들이 직접 강의를 맡아 하고 있습니다. 학생들은 거의가 나이 많은 어른신들인데 우리나라 역사와 문화에 대해 관심이 많은 분들로 200명이나 됩니다. 월요일마다 찾아가는 북악산 밑에 자리 잡고 있는 민속 박물관은 한국 대통령의 관저와 집무실인 청와대 앞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또 서울에 있는 5대 궁궐의 하나인 경북궁 안에 위치하고 있어 매번 국립민속박물관에 드나들 때마다 청와대의 본관과 부속건물들 위에 높이 날리는 태극기를 바라보면서 나도 당당한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이라는 긍지감으로 가슴이 뿌듯해집니다.

사실 제 고향이 평양이고 또 평양에서 많은 세월을 살았지만도 김일성이나 김정일의 집무실이 어느 곳에 있다는 것만 알았지 그 근처에는 가 볼 수도 없었고 갈 생각도 못했습니다. 금수산 궁전이라는 곳도 사방 50리쯤은 일반시민들의 접근이 금지되어 있거든요.

하기에 오늘도 박물관대학으로 들어가는 길 양옆에 노란 개나리꽃과 진달래꽃, 빨간 홍매와 살구꽃이 활짝 핀 모습으로 박물관을 찾는 모든 사람들을 반겨주고 있습니다. 줄지어 들어가는 박물관 대학 학생들 속에 함께 어울려 있는 제 모습을 기억하고 싶어 활짝 핀 살구 나뭇가지를 잡고 손전화기 사진으로 남겨 놓았습니다.

1학기 첫 시간에는 원효대사의 생애와 사상에 대해서 서울대학교 남동신 교수님의 강의가 있었습니다. 너무도 높은 이론수준의 교육이기도 했습니다만 생전 처음 듣는 얘기라 이해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렇다고 특이하게 도중에 질문할 수도 없었습니다. 하기에 저는 괜히 입학을 했나? 도중에 그만 두려는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강의에서 배운 기초지식을 가지고 현장 답사를 다녀오는 과정에서 강의내용이 이해도 되고 재미도 있습니다. 또 우리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새롭게 접하고 이해하게 된다는 자부심에 마음가짐도 달라졌습니다.

사람은 늙어 죽을 때까지 배워야 한다는 말, 지식이 있어야 앞을 볼 줄 안다는 말이 바로 나 자신을 두고 한 말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가져 봅니다. 이러한 마음가짐과 열심히 따라 가기 위해 노력한 덕분인지 이제 많은 분들이 칭찬도 해주고 격려도 해줍니다.

사실 주변 분들로부터 소개를 받고 입학을 결정하는 순간까지 생각이 많았습니다. 200명이 넘는 학생들 가운데 탈북자는 한 사람도 없었거든요.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그 어려운 역사와 문화에 대해서 잘 이해하면서 따라 갈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이 있기도 했지만 오랜 동안 안보 강사로 활동을 해온 저로서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사실 요즘에는 한 살 두 살 나이를 더 먹으면서 지난날 북한에서 부모님의 소원대로 군이 아니라 대학에 갔었다면 하는 생각을 자주 해 봅니다. 남의 집보다 많은 딸을 둔 아버지는 딸 여섯을 각기 다른 직업에 종사 하도록 했습니다.

그중 둘째인 저한테는 의학대학을 졸업하고 의사가 되는 것이 소원이라고 늘 얘기하셨습니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하라는 공부는 하지 않고 부모님이 제일 싫어하는 운동만을 좋아 했습니다. 그런 와중에 저는 공부만 해야 한다는 아버지의 잔소리가 싫어 아버지처럼 군인이 되겠다고 부모님도 모르게 군에 자원했거든요.

부모가 되고 나이가 들어 부모님 나이가 되어 보니 부모님의 말씀을 듣지 않은 것이 후회가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곳 한국생활 처음에는 우리 아이들을 무조건 대학에 보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자식을 이긴 부모 없듯이 저 역시 자식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지금은 비록 우리 아이들이 좋은 대학은 안 나왔지만 성실하게 사는 모습을 보면 먹지 않아도 배가 부릅니다. 하지만 처음에 아들이 대학을 포기 하고 회사에 취직을 하겠다고 할 때 마음이 아프기도 했습니다. 북한에서는 대학을 가고 싶어도 특별하게 머리가 좋지 않으면 계급적 토대가 받침이 되어야 겨우 갈 수 있습니다.

하기에 이곳 한국에 온 우리 탈북자들은 북한에서 대학에 가고 싶었던 한이 남아 있기에 그 한을 풀기 위해 대학에 갑니다. 이곳 한국에는 계급적 차이가 없이 누구나 본인이 희망하면 대학에 갈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보다 중요한 것은 대학이든 중학교이든 초등학교이든 나이에 관계없이 언제나 학교의 문은 열려 있습니다.

하기에 80이 넘은 어른신들도 대학에 입학하고 대학뿐만 아니라 초등학교나 중학교나 고등학교에도 60~70대 나이 많으신 어르신들이 다니고 있습니다. 농담으로 자주 이런 말을 합니다. 북한에서는 대학에 갈 수 없어 못나왔다고 하지만 이곳 한국은 대학을 가기 싫어 안 나왔다고 말입니다.

최근 정착한 우리 탈북자들 중에는 아이들이 좋은 교육을 받기 위해서는 한국으로 가야 한다는 희망과 꿈을 가지고 사선을 뚫고 찾아온 경우가 많습니다. 북한 같으면 내 나이에 대학이란 꿈도 꿀 수 없겠지만 저는 버젓이 우리나라 역사와 문화를 배우는 민속박물관대학의 학생이 되었습니다. 서울에서 김춘애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