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원증과 훈장이 밥 먹여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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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음식점에서 점심 식사를 맛있게 하고 있었습니다. 음식점에 설치된 텔레비전에서는 내 고향 평양의 모습이 나왔습니다. 뒷좌석에서 식사하던 한 분의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아이고, 저 사람들은 저 훈장을 가슴에 달기 위해 얼마나 많은 거짓을 꾸며 가며 고생을 했을까” 주위의 다른 사람들에게는 뜬금없는 얘기였겠지만 마치 저한테 하는 말 같이 들렸습니다. 나 자신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머리를 돌려 보니 나이 많은 어르신이었습니다.

수저를 손에 든 채 지난날 군복무 시절의 추억에 잠겼습니다. 처음 고등 중학교를 졸업하고 18세 나이에 군복을 입고 도착한 곳이 바로 황해도 재령군이었고 그곳에서 신입 병사 훈련을 마치고 배치를 받고 간 곳이 바로 례성강이 빤히 내려다보이는 부대였습니다. 6개월 신입 병사시절 당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던 그대로 그야말로 말뚝대대였습니다.

부대 군인들의 환영을 받고 잠자리에 누웠는데 캄캄한 밤하늘의 반짝이는 별들이 수없이 한 눈에 안겨 왔으며 발은 천막 바깥으로 나가 늦은 가을의 추위에 발이 시려 왔습니다. 그야말로 별을 이불로 삼고 누운 불편한 잠자리였거든요.

평양에서 여성군인들의 예쁜 모습만을 보고 자라온 저로서는 난감하기도 했습니다만 아침 5시 기상나팔 소리에 눈을 뜨고 일어나서 첫 훈련이라는 것이 손에 삽과 곡괭이를 들고 고사포 진지 굴설과 로켓포 진지 굴설 작업 그리고 병실 건설이었습니다.

여성군인이라는 생각은 전혀 없고 그야말로 돌격대 전투장을 연상케 했었습니다. 낮과 밤이 따로 없었습니다. 시간과 세월이 가면서 내 손으로 병실도 건설되었고 고사포 진지도 하나둘 건설됐고 로켓포 진지와 남자들의 병실도 건설이 되고 보니 어느 정도 군인다운 면모가 났습니다.

그야말로 말뚝만 박아 놓았던 부대의 면모가 하나하나 자리 잡아 가고 보니 당시 공군 사령관이었던 오극렬이 직접 부대를 찾아 와 우리의 수고를 치하했고 총화사업으로 표창이 있었습니다. 그때 제 나이 20세였습니다. 훈장3급을 수여 받았고 입당 청원서를 썼습니다. 그 이후 소대장 시절 공군절을 맞으며 군공 메달을 받았습니다.

북한에서는 군공 메달하면 골고루 메달이라고도 합니다만 어린 나이에 벌써 저는 국기 훈장 3급과 군공 메달을 가슴에 달게 됐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해할 수 없는 어렵고 힘든 시절도 많았습니다만 그러고 보면 다른 친구들에 비하면 군복무 시절 누구보다도 받을 수 있는 혜택과 배려는 다 받았다고 자부했습니다.

어느덧 나이가 들어 군복을 벗고 제대되어 고향으로 돌아가 보니 동창들은 대학을 나와 평양에서 제일 큰 적십자 병원 심장 내과에서 열심히 환자 치료를 하고 있었고 또 한 친구는 교편을 들고 또 한 친구는 체육대학에서 빙상 선수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는 기껏 배치 받았다는 것이 평양시 수산물 종합상점이었습니다.

딩원이 되어 가슴에 훈장을 달고 장교 계급장을 달고 고향에 도착할 때에 부풀었던 심정은 사라지고 친구들이 부러웠습니다. 아마 군복이 아니라 부모님 요구대로 의학대학을 나왔더라면 지금 이곳 한국에 와서도 아마 아픈 사람들을 치료해 주는 의사가 될 수 있었겠는데 하는 생각을 가끔은 해 봅니다.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면서 어려운 생활 속에서 주민들의 입에서는 자주 이런 말들이 나왔습니다. ‘당증에서 밥이 나오는가, 훈장이 밥을 먹여 주는가’ 정말 맞는 말이라고 생각됩니다. 때 아닌 장소에서 점심을 맛있게 먹다가 갑자기 지난 세월을 잠시 추억해 보는 시간이 되었네요. 서울에서 김춘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