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저는 몇몇의 친구들과 함께 북한과 제일 가까운 거리에 있는 통일촌을 다녀왔습니다. 저는 2년 전 전쟁기념관에서 북한의 실생활 등에 대해 전하는 안보 강사로 활동했었거든요. 그때 국방부에서 오랜 세월 근무했었다는 한 분이 제 강의를 듣고 제 전화번호를 물어본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부모님을 생각하며 거리낌 없이 전화번호를 적어드렸는데 얼마 전 점심을 함께 하고 싶다는 전화가 왔습니다.
처음에는 어느 분인지 긴가민가 하는 생각으로 아는 언니와 함께 약속 장소로 갔습니다. 사무실 근처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얘기 중 그 분이 통일촌에 오래전에 구입해 놓은 땅이 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미 해설 강사 활동으로 통일촌을 여러 번 다녀왔었지만 언니는 처음 듣는 말이라 많은 호기심을 보였습니다. 마치 아버지 같이 친절하신 그분은 마침 요즘 콩을 심기 위해 자주 통일촌에 들어가신다고 하면서 관광을 시켜주겠다고 했습니다. 하여 우리는 지난 주말 공덕 전철역에서 열차를 바꿔 타고 문천으로 갔습니다.
문천 역에 도착하니 벌써 자가용 승용차를 가지고 그분이 부인과 함께 우리를 기다렸습니다. 차 역시 고급 승용차였습니다. 고향에 계시는 부모님 만나는 기분인 것 같기도 하고 어딘가 모르게 묘한 기분이 들기도 했었습니다만 한 30분 정도 달려 드디어 통일교에 도착하자 우리는 키 크고 나무랄 데 없이 늠름한 헌병군인 장병들에게 주민등록증을 보여주고 다시 달렸습니다.
임진강을 건너 작은 야산들을 돌고 돌아 목적지인 그분의 텃밭에 도착했습니다. 시원하고 맑은 공기에 두 친구는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건강을 극성히 챙기는 언니는 고들빼기를 보자 정말 통일촌에는 모든 것이 무공해라는 말에 입을 다물지 못하고 뿌리 채 캐기 시작했습니다.
인삼밭 주변에 있는 고들빼기는 정말 깨끗하고 신선했습니다. 어느새 큰 비닐봉지에 가득 채워졌습니다. 점심은 통일촌 부녀회 식당에서 장단콩 된장국에 맛있게 먹었습니다. 통일촌에만 있는 장단콩 된장국에 밥을 먹은 뒤 우리는 망향제단 위에서 고향을 보았습니다. 우리 태극기가 바람에 휘날렸습니다.
북한쪽에도 인민기가 있었는데 우리 태극기보다 조금 높은 곳에 달려 있는 모습을 가리키며 저는 친구들에게 북한의 인민기는 우리 태극기보다 60m 더 높이 매달았다고 이전에 들은 얘기를 해주었습니다. 같이 간 언니는 인민들은 굶겨죽이면서 깃발만 높이 달아놓으면 무슨 위상이 올라가느냐고 말했습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도라산역으로 갔습니다. 역 안내원들과 따끈한 커피를 한잔하기도 했고 상점에 들어가서 코리아라고 한국을 영어로 박아놓는 수저를 기념으로 구입하기도 했고 통일촌에서 지은 20Kg 쌀 한 포대를 구입했습니다. 결국 우리는 비무장지대, DMZ 통일촌을 한 바퀴 관광했습니다. 비록 생각지 않았던 관광이었지만 아무나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관광이어서 다른 관광보다 조금 특별했습니다. 오후가 되자 보슬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시간이 갈수록 빗줄기는 더욱 굵어졌습니다.
그분은 오히려 우리들에게 힘들고 어려운 고비를 넘기며 고생이란 고생을 너무 많이 한 귀중한 분들이라고 하시면서 저녁식사도 대접하고 싶다고 해 우리는 통일촌을 나와 오리 고기 음식점으로 갔습니다.
마치 고향에 계시는 친정집을 찾은 형제들 같았습니다. 둥근 식탁 위에 앉아 오리 고기구이에 복숭아 약주까지 한잔 하니 부모님 앞에 선 자식이 응석이라도 하듯 저는 스스럼없이 엄마와 같은 분에게 미주알고주알 지난날 있었던 아픈 기억과 함께 이곳 대한민국에 와서 행복하고 즐거웠던 추억을 얘기했습니다.
비록 조금 이른 저녁 식사였지만 너무도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그분들에게 오디를 따러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한 채 우리는 일산 전철역에서 전철을 타고 집으로 왔습니다. 서울에서 친구들과 헤어져 남부 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집으로 오는 내내 날개 달린 새라면 잠시 잠깐이라도 고향에 다녀왔으련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지척에 두고도 갈 수 없는 고향을 새삼 그려 보았습니다. 내가 지금 북한에 있다면 과연 어떤 모습일까, 천국과 지옥에서의 내 인생의 삶을 다시 한 번 비교해 보았습니다. 서울에서 김춘애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