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은 국가보훈의 달입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우리의 영웅들을 기리듯이 또 그 가족들을 위로하듯이 아파트 단지마다 동네마다 길거리마다 대한민국 어딜 가나 6월의 빨간 장미꽃이 활짝 피었습니다. 길거리를 걷는 사람들은 걸음을 멈추고 활짝 핀 빨간 장미꽃 향에 취해 사진을 카메라에 담습니다. 마실을 나오신 동네 어르신들은 빨간 장미꽃 울타리로 되어 있는 동네 정자에 앉아 시간 가는 줄 모르네요.
마트를 다녀오던 저 역시 아는 분이 있어 잠깐 쉬어 갈 겸 정자에 앉았습니다. 이런 얘기 저런 얘기 참견하느라 조금은 분주했습니다만 한 어르신의 얘기에 눈을 크게 뜬 채 귀를 기울였습니다. 고향이 평양선교리라 합니다. 전쟁 전에는 선교리였지만 지금은 평양시 선교구역이라 하거든요. 결혼을 하고 세 아이를 낳아 키우며 18년 동안 살아온 고향이기에 나도 모르게 반갑고 기쁘기도 했습니다.
어린 시절 어머님이 자주 구어주시던 청어 반찬에 이밥을 찬물에 말아 손가락을 빨아가며 먹던 추억이 생각난다며 지금은 그 맛이 안 난다고 합니다. 선교리에서 태어난 그 어르신은 해방이 되어 가정보모를 두고 있었다는 이유로 황해도로 추방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6.25전쟁이 일어났고 아버님의 손에 이끌려 이곳 남한으로 내려 왔다고 하네요.
아버지 그리고 오빠와 함께 왔지만 어머님은 북한에 있다고 합니다. 어머님이 그리워 이산가족 방문 신청을 여러번 했었지만 승인이 거부되어 만나보지 못했다고 하네요. 요즈음에는 돌아가셨는지 살아 계신지 모를 어머님이 그리워 잠이 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분은 해마다 장미꽃이 피는 6월이 오면 고향 생각이 더 난다고 합니다.
고향에 계시는 어머님은 남달리 빨간 장미꽃을 좋아 했다고 하시면서 집뜰 앞에 국화꽃, 백일홍꽃등 여러 가지 아름다운 꽃들이 있었지만 특별히 울바자에 활짝 피어 있던 장미꽃을 애지중지 가꾸고 더 예뻐하셨다고 합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전쟁이 일어나자 어느 날 잠깐 피난 갔다 왔는데 폭격에 무너진 집을 보시고 슬피 우셨는데 철없던 어린 마음에 사라진 장미꽃을 두고 우시는 줄 알았다고 하네요.
아마도 자식 모르게 장미꽃에 잊지 못할 깊은 사연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지금도 해마다 장미꽃을 보면 어머님이 그리워진다고 합니다. 변화된 선교 구역에 대해 자세하게 얘기 나누었습니다. 그 옛날 율곡시장 자리에는 지금 수많은 고층 아파트와 살림집들이 들어섰고 율곡중학교는 학생들의 중창노래로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다고 얘기 해 주었습니다.
너무도 오랜 만에 고향 소식을 들었다고 반가워하며 손수건을 꺼내 눈에 가져가기도 했습니다. 당시 성분이 좋았던 어머님은 외할아버지가 빼돌렸다고 하네요, 얼마 뒤에는 재혼을 했지만도 어머니와 생이별을 한 아버지는 한 동안은 술로 세월을 보냈다고 합니다. 가족이 없고 친척이 없이 얼마나 외로울지 그 마음을 모르는 사람은 모른다고 하시면서 자주 만나 좋은 얘기를 많이 하면서 열심히 살면 된다고 제 등을 가볍게 두드려 주었습니다.
헤어져 집을 들어오는 저는 “전쟁이 아니었으면 어머님과도 생이별이 없었을 것이라고, 북한이라는 곳에서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그 놈의 성분 때문에 어린 나이에 어머님과 생이별과 함께 어머님을 한평생 그리워하며 살아야 하는 마음의 상처가 없었을 것인데…” 라는 어르신의 얘기가 마음에 깊이 와 닿았습니다.
남과 북이 갈라져 있는 우리에게 생이별이라는 가슴 아픈 사연은 숙명처럼 따라 다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져 봅니다. 70여년 이란 오랜 세월동안 생이별이라는 단어는 끊이지 않고 계속 이어 지고 있습니다. 고향을 지척에 두고도 갈 수 없는 실향민들과 탈북민들의 처지가 한스럽습니다. 요즘처럼 로켓 발사를 하루가 멀다하게 쏘아 댈 때에는 고향이 북한이라고, 평양이라고 떳떳하게 얘기를 할 수 가 없네요.
이 땅에 두 번 다시 전쟁은 없어야 합니다. 또 다시 가족이 생이별을 당하는 아픔이 우리 역사에 되풀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서울에서 김춘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