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생활 10년이 남긴 것

탈북자 출신 화가 1호인 선무씨의 작품 '울려라 행복의 노래'
탈북자 출신 화가 1호인 선무씨의 작품 '울려라 행복의 노래' (PHOTO/충정각 화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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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19일은 저에게 있어서 제 인생에서 가장 뜻깊고 잊을 수 없는 날이랍니다. 제가 이곳 한국에 온지 10돌이 되는 날이었거든요. 우리 아이들과 함께 이곳 대한민국 서울에 온지 벌써 10년이란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사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에는 친척도, 친구도 아는 이 한명 없는 이곳 한국에서 어떻게 적응을 하며 살아갈 것인가 하는 근심과 걱정으로 조금 두렵기도 했습니다.

특히 10대 철부지 어린 나이에 서로 이산가족이 아닌 이산가족이 되어 오랜 세월 중국과 북한 두 나라에 떨어져 살며 말 못할 많은 상처만을 가슴에 안고 살던 우리 아이들과 이곳 대한민국에서 과연 잘 살아갈 수 있을까, 또 적응은 잘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어깨가 무겁기도 했습니다.

12살 어린 나이에 저와 헤어져 사춘기 나이인 19살까지 북한에 홀로 남아 갖은 고생을 하다 만나게 된 아들은 왜 자기를 버리고 왔냐고 서러워했습니다. 컴퓨터 학원과 검정고시학원을 다니던 아들은 갑자기 변화된 새로운 환경에 적응 못 해 두 학원을 다 때려 치고 북한으로 다시 가겠다고 하루에도 몇 번씩 여권을 요구해 남모르게 소리 없는 눈물도 많이 흘렸습니다.

생계비 문제로 회사 근처로 전입신고를 하라는 엄마의 제안을 받았을 때 이곳 자유민주주의 나라인 한국사회를 잘 몰랐던 큰딸 역시 왜 자기를 호적에서 떼어 버리려고 하는가 하고 서운해하는 모습을 보며 마음이 괴롭고 아팠습니다. 또 처음에는 누구나 그러하듯이 경제적 어려움은 생각지도 않고 자가용 승용차를 가지고 싶어 했던 우리 아이들, 10대 어린 나이에 오토바이를 구입해 달라고 틈만 있으면 졸라대는 아들을 달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2년이란 세월이 지나면서 힘들고 어려운 고비마다 하나하나 경험과 교훈으로 삼아 가며 조금씩 열심히 노력하며 적응하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때로는 대견하고 기쁘기도 하지만, 때로는 마음이 짠하기도 하고 아프기도 했습니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검정고시를 위해 대안학교에 다니던 아들이 고민을 끙끙 앓고 있었습니다.

누나들이 없는 틈을 봐서 아들에게 물었더니 여자 친구가 생겼는데 같은 반지를 맞춰 끼는 커플 반지를 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저는 서슴지 않고 은행에서 현금을 찾아주기도 했고 여름 방학에는 중국어를 잘하는 친구와 함께 중국여행을 보내주기도 했습니다. 추운 겨울 중국집 배달을 하고 늦은 밤에 귀가를 하는 아들의 모습을 보고도 남모르게 눈물을 흘렸습니다.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아이들이 실력을 쌓아 회사에 취직해 첫 월급을 받아왔을 때에도 누구보다 제일 먼저 기쁨의 눈물을 흘렸고 소중하고 귀중한 그 월급을 몇 달째 쓰지 않고 간직하고 다녔습니다. 또 작은딸이 회사에서 표창장과 상금을 받아 왔을 때에도, 자가용 승용차를 구입했을 때도 기쁨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북한에서 남편의 평생소원이 차 운전을 해 보는 것이었건만 그 소원을 이루어 보지 못한 채 북한에서 세상을 떠났거든요.

친척 없고 아는 이 하나 없는 이곳 한국 생활 10년, 지금 우리 아이들은 비록 이곳 남한의 젊은이들처럼 좋은 대학은 나오지 못했지만 두 딸은 한 남편의 아내로 또 한 아기의 엄마가 되어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고 아들은 당당하게 회사 간부들과 많은 사람들의 칭찬 속에서 열심히 노력하면서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먹지 않아도 배가 부릅니다. 저는 이곳 대한민국에서의 새로운 삶 속에서 진정한 기쁨과 행복한 삶이 어떤 의미인가를 진심으로 알게 됐고 사랑하는 내 가족이 있었기에 오늘과 같은 행복이 있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북한에서 반생을 살았던 저는 자주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김일성은 인민들에게 고래 등 같은 기와집에, 비단옷을 입혀주고, 이밥에 고깃국을 먹여주는 것이 소원이고 김정일은 그 유훈을 이어가겠다고 항상 입버릇처럼 거짓 정신 교육을 시켰습니다. 어린이들 역시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왕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김일성과 김정일, 김정은은 3대 세습을 이어가면서도 인민들에게 기와집에 비단옷, 고깃국에 이밥을 주는 것이 아니라 정반대로 굶어 죽는 인민들을 보고만 있습니다. 더욱이 핵 실험과 핵 로켓 발사로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뿐만 아니라 세계인민들에게 공포를 주고 있습니다.

북한 어린이는 나라의 왕이라고 대내외에 선전을 하고 있지만 한참 배우고 배불리 먹어야 할 어린이들을 국제 고아로, 꽃제비로 만들고 있습니다. 이번에도 자유를 찾아오는 꽃제비 고아들을 라오스에서 강제 북송시켜 국제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내 고향 북한 주민들도 우리와 같이 먹고, 쓰고, 살 걱정이 없는 행복한 삶을 살 그날은 꼭 올 거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생활 10돌,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케이크에 켜 놓은 촛불을 끄는 순간, 지나간 추억을 해 보면서 서울에서 김춘애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