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딸의 결혼기념일

사진은 결혼기념일을 맞은 한 부부가 대전 한밭수목원에서  두 딸과 함께 기념 나무를 심는 모습.
사진은 결혼기념일을 맞은 한 부부가 대전 한밭수목원에서 두 딸과 함께 기념 나무를 심는 모습. (사진-연합뉴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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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이라면 누구나 챙기는 날이 있습니다. 결혼하면 생일처럼 해마다 결혼한 날을 기념하는 결혼기념일을 챙기는 것이 서로에 대한 사랑과 배려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여자들은 결혼기념일에 사랑하는 남편에게서 은근히 결혼 기념 선물을 기대합니다. 우리 아이들도 이곳 한국생활에 익숙해져 해마다 결혼기념일을 잊지 않고 챙기는 것이 이젠 습관이 되었습니다.

지난 주말이 바로 둘째 딸이 결혼한 지 5주년이 되는 결혼기념일이었답니다. 주말이라 저는 조카와 함께 늦은 오후 딸들과 수다를 떨어본지도 조금 오래됐고 또 작은 손자들이 보고 싶은 생각에 둘째 딸집으로 갔습니다. 마침 주말이라 사위도 있었고 어린이 집에 다니는 손자 녀석도 있었습니다.

9월이면 두 돌이 되는 손녀딸애는 어린이 집에서 배워온 노래에 춤을 추느라 여념이 없었습니다. 손녀의 재롱에 푹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는데 둘째딸이 느닷없이 포도주 두 병을 꺼내놓았습니다. 무슨 포도주인가고 물으니 어린이 집 원장님이 결혼 기념 선물로 보내주셨다고 합니다.

해마다 어린이 집 원장님은 학부모들의 결혼기념일을 잊지 않고 포도주를 예쁘게 포장해서 선물로 꼭꼭 보내주었는데 올해는 두 아이가 한 어린이 집에 다니다보니 두 병을 받았다고 합니다. 옆에 앉아 묵묵히 듣고 있던 조카딸은 하루 빨리 자기 아기도 어린이 집에 보내야겠다고 했고 저는 정말 좋은 세월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거기에 한마디 덧붙였습니다. 이 엄마도 다시 너희들 같은 나이가 되돌아올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대한민국이 우리 여성들이 살기 좋은 나라기도 하지만, 북한과 비교하면 아이들도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아이들이라는 말을 하면서 저는 지나온 세월, 우리 아이들을 키우던 어렵고 힘들었던 시절 추억을 다시 한 번 떠올렸습니다.

내 고향 북한에서도 사망한 날짜를 기억하거나 생일제를 하기는 하지만 이곳 남한 사람들처럼 해마다 결혼기념일을 기억하고 챙기는 사람들은 별반 없습니다. 저 역시 북한에서 결혼 생활을 18년간 했지만 해마다 1월 25일이 되면 마음속으로 ‘오늘이 결혼한 날인데’ 하고 생각만 여러 번 해보았지, 특별히 남편과 추억에 남을 만큼 기념해본 적은 없습니다.

5년 전 우리 딸이 결혼식을 하던 날은 날씨가 무척 좋았습니다. 속담에 시집 장가가는 사람들의 마음이 예쁘면 결혼하는 날, 날씨 역시 좋다고 말을 합니다만 제 결혼식 하루 전날에는 함박눈이 펑펑 쏟아져 내린 다음날이라 결혼 당일 날에는 정말 날씨가 깨끗하고 따뜻했습니다.

제 결혼식 날을 떠올리다 딸의 결혼식 날엔 왜 그렇게 울었는지, 왜 눈물이 그렇게 쏟아져 내렸는지 지금 생각해 보면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군복무를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결혼해 남의 집으로 보내는 부모님이 절 보며 울던 마음은 이해가 됩니다. 아마 그와 마찬가지로 고향을 떠나 말도 통하지 않는 중국에서의 고통과 강제 북송으로 인한 수많은 고통을 함께 겪어온 딸이기에 더더욱 눈물이 나왔나 봅니다.

그런데 벌써 5년이란 세월이 흘렀고 이제는 예쁜 왕자님과 공주님을 낳고, 시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한 남편의 아내로, 두 자식의 엄마로 살고 있는 딸을 보니 너무도 기쁘고 행복했습니다. 지나간 세월의 눈물과 지금의 행복을 되새기던 사이, 사위는 정육점에 가서 제가 제일 좋아하는 육회를 사왔습니다.

사위가 부어주는 포도주를 받아든 저야말로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장모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조카는 이곳 남한에 온지 3년이 조금 지났지만 포도주를 처음 마셔본다고 합니다. 그렇게 웃고 떠들고 행복해하는 내 가족을 지긋이 바라보다가 어느새 행복한 눈물이 흘러나왔습니다.

진정한 행복이 무엇이고, 진정한 기쁨이 어떤 것인지 이곳 남한에서 크고 작은 일들로 체득했습니다만 그 중에서도 매일 매일 저는 사랑하는 내 가족들과 함께 둥근 밥상에 모여앉아 먹고 떠들고 웃고 있는 시간이 제일 행복하고 즐겁다고 느낀답니다.

워낙 저지르기 좋아하는 성격을 가진 저는 기쁜 나머지 노래방으로 갔습니다. 재미있던 것은 노래방에 오니 자식들보다 손자들이 더 좋아했습니다. 고사리같이 작은 손에 방울북(탬버린)을 들고 춤을 추며 마이크를 손에 쥐고 음악에 맞추어 노래까지 불러댔습니다. 생각지도 않았던 딸의 결혼기념일에 손자 손녀가 부어주는 와인에 취해 잊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추억을 만들었습니다. 서울에서 김춘애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