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이었습니다. 37도의 높은 온도라 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비 오듯 쏟아집니다. 일요일에 비가 온다는 기쁜 소식과 함께 한창 구슬땀을 흘리며 들깨 모를 심고 있는데 친구가 찾아 왔습니다. 서울에 거주하고 있는 친구는 남편을 따라 1년 넘게 부산에서 생활하고 다시 서울로 올라 왔다면서 갑작스럽게 찾아온 것입니다. 정말 오랜만에 만난 친구라 반가웠습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지만 한동안 소식이 뜸했었는데 정말 반가웠습니다. 비록 성은 다르지만 이름이 꼭 같은 이 친구는 저에게는 동생과도 같은 친구입니다. 친구는 한동안 콩밭과 들깨밭을 하염없이 넋을 잃고 들러 보면서 계속해서 ‘복 받은 지주가 됐네요.'라는 말을 반복합니다. 웃음 섞인 농담반 진담반인 친구의 말을 듣는 저는 그리 싫지 않았습니다.
처음 만나 보는 친구의 남편 역시 아주 편하고 좋은 분이었습니다. 순간 저에게도 제부가 생겼다는 생각을 하니 무지 반가웠습니다. 한편 저는 정말 나라는 여자는 복이 있는 여자가 맞는가보다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속담도 있습니다만 북한에서는 너무도 열악한 생활고를 겪으면서 쥐구멍에도 해뜰날이 있다고 하지만 아무리 노력을 하고 열심히 해도 어려운 생활고를 벗어 날수가 없어 하루에도 여러 번 남편에게 투정 섞인 한탄을 많이 했었거든요. 모든 것이 능력 없는 남편과 내 탓으로만 생각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어려움이 왜 남편 때문이고 내 탓이었을까 하는 후회도 있지만 지난날 그런 어려움이 있었기에 오늘의 행복이 있지 않나 하고 생각해봅니다. 이곳 대한민국으로 오는데까지 정말 말 못할 수많은 상처들이 있었지만 지난날의 고생이 있어 오늘의 행복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북한식으로 말하자면 개인 도급제를 실시했습니다. 비록 얼마 되지 않은 밭이지만 잠깐 새 들깨 모 심기가 끝났습니다. 보람찬 하루를 마친 뒤. 뒤풀이가 없으면 정상이 아니죠. 제가 정성스레 담가놓았던 오갈피술을 친구에게 대접하면서 귀한 손님에게만 대접한다고 또 한 번 우스갯소리를 늘어놓은 다음 늦은 점심 겸 이른 저녁상을 차렸습니다.
첫 만남의 자리라 두 남편들은 조금 쑥스러워 했지만 어느새 친구가 되기도 하고 형님 동생이 되었습니다. 평상시에는 소심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친구이지만 소주 한잔 마시면 정말 재미있는 친구이자 동생입니다. 한잔의 약술을 비운 친구는 눈물과 웃음 없이는 듣지 못할 지난날의 얘기를 합니다.
고향은 함북도이지만 황해도로 출가한 그는 첫 아들 입덧을 하면서 단고기가 너무 먹고 싶어 중대 정치지도원이 기르는 개를 하루종일 쫓아 다녔다고 합니다. 옛말에나 나올까 말까 하는 북한의 현실입니다. 단고기를 먹고 싶다는 아내의 말을 들은 친구의 남편은 개고기 대신 닭을 구입해 가마에 넣고 그만 깜박 잠이 들었는데 친구는 잠자는 남편도 모르게 닭 한 마리를 혼자서 다 뜯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그는 잊을 수가 없다고 하면서 그 남편은 지금 살아있을까 하고 덧붙였습니다. 친구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가랑가랑합니다.
이런 얘기 저런 얘기로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친구와 그의 남편은 작은 별장을 두고 텃밭도 있고 아침 일찍 잠에서 깨어나면 좋은 공기를 마시면서 텃밭을 가꾸는 것이 소원이라고 하면서 정말 부럽다고 합니다.
제가 직접 심고 가꾼 발갛게 익은 토마토와 가지 오이 그리고 감자를 조금 챙겨 주었습니다. 이것저것 챙겨보니 한 보따리 됐습니다. 친구는 박스를 차에 실으며 마치 친정집에 왔다 가는 기분이라고 하면서 또 한 번 눈이 촉촉해졌습니다. 앞으로 우리 자주 왕래를 하기도 하고 또 등산도 함께 다니자는 약속을 했습니다.
지난날 나에게도 친정어머니가 있었고 친정이 있었는데 애들이 겨울 방학을 맞아 저는 아이들과 함께 친정집을 다녀 온 적이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지방 출장으로 감자와 줄당 콩이 조금 생겼다고 하면서 바리바리 저에게 싸주었던 시절이 생각났으며 그 시절이 새삼 그리워지기도 합니다.
친구를 떠나보내고 저 역시 남편과 함께 자가용 승용차를 타고 집으로 오는 내내 지나간 세월에 대한 추억과 함께 ‘텃밭에 별장’이라는 친구의 말이 생각났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저에게는 아주 어색하고 생소한 단어였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 잠깐이나마 친구가 부러워하는 지금 저에게 차례진 생활이 응당한 것이라 착각하고 살아온 자신이 조금 부끄러웠습니다.
사실 북한 주민들로서는 상상도 생각도 할 수 없는 생활이거든요. 지나간 고생과 오늘의 행복한 생활이 엇바뀌어 영화의 화면처럼 스쳐 지나가기도 합니다. 친구와 약속했습니다. 행복하고 즐거운 인생을 만들어 가며 사는 것이 우리의 남은 목표라고 말입니다. 이곳 대한민국에 도착한 후로는 지금까지도 그러 했지만 오로지 이 목표를 향해 함께 가자는 약속을 해봅니다. 서울에서 김춘애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