볏모를 심고 씨를 뿌리고 꽃이 피고 하던 봄이 엊그제 같았는데 벌써 곡식을 걷어 들이고 과일을 수확하는 완연한 가을이 되었습니다. 젊은 시절에는 잘 몰랐는데 이제 나이가 들고 머리엔 흰서리가 내린 요즘은 눈감았다 뜨면 한 살 더 먹고, 너무도 시간과 세월이 빨리 흘러간다는 것을 실감하게 됩니다. 나무 잎이 한잎 두잎 떨어지는 가을이 되면 쓸쓸한 마음 또 한 밀려오거든요,
누렇게 변해 가는 황금들판을 바라보는 순간 갑자기 여행을 다녀오고 싶은 충동이 생기곤 합니다. 이런 충동적인 마음 또한 늙어 가는 내 모습이기도 합니다. 마침 요즘은 전어와 꽃게, 대하의 철이기도 합니다. 마음이 통하는 몇 몇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대하 구이를 먹으로 가자면서 친구들은 선뜻 여행 가는데 동의했지만 막상 목적지를 정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생각해 두었던 대천 해수욕장이 어떤 가고 물었습니다. 모두 다 좋다고 했습니다. 주말에는 차가 많이 막히는 탓으로 우리는 평일을 택했습니다. 일행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또 그리 적은 인원도 아니었습니다.
일찍 서둘러 출발하다 보니 생각보다 일찍 목적지에 도착했거든요. 아는 분의 소개로 보령시 성주산에 있는 성주사지와 탄광 박물관을 관광하기로 했습니다. 성주사는 한때 200여명의 승려들이 머물며 수도하던 손꼽히던 절이었지만 지금은 절터와 몇 개의 유물들만 남아있어 이곳이 절이었다는 것을 알려 주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주변 성주산의 계곡과 높은 산들의 절경과 산세는 너무도 훌륭했습니다. 언제인가 제가 강의하러 갔던 곳이라 더욱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성주사를 관광하고 우리는 다시 석탄 박물관을 찾았습니다. 석탄 박물관을 들어가는 순간 저는 오늘날 북한의 탄광 광산 노동자들이 석탄을 캐는 모습과 너무도 같은 모습을 그대로 전시해놓은 것에 놀랐습니다.
그 모습은 바로 60년대 남한 탄부들의 모습이라고 합니다만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의 북한 탄광 노동자들과 탄광촌 주민들의 생활 모습과 너무도 같았습니다. 그 전시장의 모습에 놀란 저는 지금도 한국에 저런 탄광과 광부들이 있는지 궁금해져서 질문을 하기도 했습니다.
탄광 박물관에는 구멍탄을 빚는 기계도 있었습니다. 저는 지난날 내 고향에서 구멍탄 빚던 얘기와 연탄 아궁을 손이 갈라 터지도록 직접 만들었던 얘기를 했습니다. 함께 간 친구들 역시 지나간 추억을 떠올리며 떠들썩했습니다. 석탄을 캐기 위해 지난날 우리의 탄부들이 광차를 타고 지하 막장으로 들어가던 모습을 영상으로 보기도 했고 우리들도 직접 승강기를 타고 지하 막장으로 들어가 탄부들이 석탄 캐는 모습을 사진으로 모형으로 보기도 했습니다.
착암기로 구멍을 뚫고 그 안에 화약 장치를 넣어 폭파하는 식으로 석탄을 캐는 모습에서 잠시 저는 고향에 있는 외사촌 오빠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군복무 13년을 마친 외사촌 오빠는 부모님이 계시는 고향으로 가지 못하고 당의 명령이라고 하면서 집단으로 덕천 탄광으로 배치를 받았습니다. 젊은 청춘의 혈기로 당의 명령을 관철 한답시고 밤낮 교대로 일을 하던 외사촌 오빠는 죽는날 아침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아침 식사를 하고 가족들과 헤어져 출근을 했는데 그날 저녁에 가족들 곁으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갑자기 갱이 무너져 내리는 바람에 그 속에 오빠가 깔렸다고 합니다. 아침에 나간 남편이 석탄에 찌들려 까맣게 된 시체가 되어 돌아오자 형님은 그만 그 자리에서 쓰러진 채 며칠 동안 깨어나지 못했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승강기는 벌써 지상 밖으로 나왔습니다. 제가 제일 기다리던 대하 구이를 위해 바닷가로 갔습니다.
우리는 대하, 전어, 꽃게 등을 제일 좋은 것으로 골랐습니다. 정말 제철 대하라 너무도 별미였습니다. 전어구이를 먹던 한 친구가 목에 가시가 걸려 캑캑 거리기도 해 많은 사람들을 웃기기도 했습니다. 서울로 올라오면서 저저마다 가족들을 위해 대하, 꽃게, 전어를 구입해 포장해 가지고 왔습니다.
서해 대교 행담도 휴게소에 들려 따끈한 커피도 한잔 하면서 넓은 바다와 서해 대교를 바라보면서 우리 친구들은 또 한번 고향에 대한 추억을 나누었습니다. 자기들 인생에서 제일 잘한 것이 비록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기기는 했지만 이곳 한국에 온 것이 인생역전이 되었다고 한목소리 얘기했습니다.
저 역시 그렇습니다. 목숨을 걸고서라도 이곳 까지 오지 못했다면, 또 과연 목숨과 바꾸어 선택을 하지 못했다면 이곳 낙원 같은 세상에 와서 새 인생을 살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친구들과 함께 이런 좋은 추억을 만들어 갈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제게는 너무도 즐겁고 행복한 하루였습니다. 서울에서 김춘애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