찜통 같은 더위도 언제 있었냐는 듯 물러가고 시원한 선들바람이 불어오는 가을입니다. 구름 한 점 없는 높고 파란 가을하늘, 그리고 뜨거운 햇살에 누렇게 익어 가는 벼 이삭들도 금빛마냥 설렙니다. 그야말로 오곡이 무르익는 풍요로운 계절의 풍성한 추석이었습니다.
이곳 한국에서는 누구나 추석 명절을 ‘민족의 최대 명절’이라고 쉽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가족은 민족 최대의 명절인 지난 추석명절을 뜻깊게 보냈습니다. 추석날 저녁이 되자 아침에 시댁에 갔던 딸들 내외와 아들과 며느리도 두툼한 용돈 봉투와 무거운 선물꾸러미를 들고 찾아왔습니다.
다른 가족들보다 늦은 감은 있었으나 20일 아침 일찍 가족들과 함께 비로소 가고 싶었던 임진각을 찾았습니다. 자유로를 한참 달리는 내내 저는 차창 문에서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달리고 있는 자유로 맞은편, 즉 임진강 건너 북한이 바라보였거든요. 어느덧 목적지에 도착해 자가용 승용차를 주차장에 주차했습니다.
추석 다음 날이었지만 임진각에는 많은 사람들로 붐볐습니다. 그중에는 얼굴이 낯익은 사람들도 있었는데 우리 가족을 보는 순간 부러워하기도 했습니다. 많은 행사로 자주 찾는 임진각이었지만 고향이 지척에 있다고 생각을 하니 이날만은 괜스레 마음이 조금 무거웠습니다.
특히 북한 개성과 연결되어 있는 철교에서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 기차를 타면 불과 몇 시간이면 갈 수 있는 내 고향 평양, 눈에서는 저도 모르게 어느새 눈물이 핑 흘러 내렸습니다. 눈치 빠른 며느리가 손수건으로 눈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었습니다.
노란 종이에 또박또박 소원을 적어 나무에 매달기도 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손자들은 너무 좋아 이리 뛰고 저리 뛰기도 하고 소리를 질러 보기도 합니다. 7살짜리 손녀 딸애가 제 아빠에게 와 본 곳이라고 자랑을 했습니다. 임진각이 처음인 큰사위는 놀라는 목소리로 재차 언제 왔었냐고 또 누구하고 왔었냐고 물었습니다.
손녀는 똑 부러지는 목소리로 할머니하고 이곳에서 북한으로 풍선도 날려 보냈고 할머니는 그걸 말리는 경찰들과 싸우기도 했었다고 조잘거렸습니다. 조금 빨개지는 제 얼굴을 슬쩍 바라보던 작은 사위는 재빠르게 장모님은 정말 좋은 일을 많이 하신다고 말해 민망했던 순간을 슬쩍 스쳐 보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통일전망대에도 잠깐 들렀습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식사를 마친 우리 가족은 집 근처에 있는 평택 호를 찾았습니다. 제일 좋아한 건 역시 손자 녀석들이었습니다. 손자들의 요구에 아들 며느리와 저는 오리 배를 탔습니다. 아들과 저는 열심히 갈매기들에게 과자를 던져줬습니다.
과자가 물 위에 떨어지기 바쁘게 갈매기들은 서로 승강이질 내기를 하며 받아먹었습니다. 저는 재빠르게 손전화기로 사진을 찍었습니다. 손자 녀석들이 갈매기들에게 먹이를 뿌려주는 모습을 담으려고 손자 녀석들의 손에 과자를 쥐어 주었는데 주는 족족 과자를 먹어버렸습니다.
할미인 저는 웃으며 갈매기들의 먹을거리를 왜 먹느냐 하니 두 손자 녀석들은 동시에 우리 과자라고 소리 질러 우리 가족은 또 한바탕 웃었습니다. 개구쟁이 손자 녀석들은 자동차도 타고 방방이도 뛰었고 또 자전거도 탔습니다. 평택호에는 우리 가족뿐만 아니라 많은 시민들이 모여 한쪽에서는 아이들의 천진난만하고 행복한 웃음꽃으로 분주했고 어떤 가족들은 숲속 그늘진 곳에 빙 둘러앉아 준비해가지고 온 음식을 놓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우리 민족 최대의 명절인 가을 추석명절, 행복한 시민들 속에 끼어 내 가족의 웃고 떠드는 행복한 모습 속에 저는 잠깐 고향 생각을 했습니다. 내 고향 북한에서는 김일성이나 김정일, 김정은의 생일을 소위 주민들의 어버이라는 의미에서 ‘우리 민족 최대의 명절’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어버이가 민족 최대의 명절인 추석에 주민들에게 술 한 병 제대로 공급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지난날 북한에서는 추석날에 3년제를 지내는 신묘를 가진 세대에 한해 인민반장들이 명단을 제출하면 겨우 술 한 병, 작은 병아리 한 마리, 사과 한 알과 배 한 알을 공급해 주곤 했었습니다만 올해 추석은 특별히 세대에 술 한 병씩 공급해 준다고 당에서 포치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술 한 병 공급받지 못한 주민들이 수다하다고 합니다.
또한 추석 특별 경비주간을 통해 두만강과 압록강을 지키는 국경 경비대 군인들에게 강물에 들어서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무조건 사살하라는 지령이 떨어졌다고 합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제 마음은 쓰리고 아프면서도 정말 고향을 떠나 이곳 한국으로 온 것이 정말 다행이라고 나름대로 우리 가족은 복 받은 가정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녁은 평택호 근처에 있는 횟집에서 먹었습니다. 그날 저녁 우리 가족은 다함께 나란히 서서 둥근 보름달을 바라보면서 각자 소원을 빌었습니다. 우리 자녀들이 하고자 하는 일이 잘되길 기원했고 또 하나는 온 가족의 건강과 행복을 빌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남쪽에서 태어나 자란 사위들이나 북한이 고향인 우리 아이들이나 하루빨리 남북이 통일되어 고향으로 가 보고 싶어 하는 마음은 한결 같았습니다. 저는 이것이 내 가족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마치 둥근 보름달 속에서 꿈에도 그리운 부모님이 환한 웃음을 지으며 내려다보시는 듯했습니다. 사실 이번 추석 연휴 기간 우리 가족은 조금 멀리 가족여행을 가려고 하다가 사정상 갈 수 없었지만 민족 최대의 명절인 올해 추석은 제가 이곳 한국생활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추석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서울에서 김춘애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