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은 우리 민족 최대의 명절 추석이었습니다. 아들은 추석날 특근이라 지난 한 주일 전에 미리 용돈과 선물을 가지고 왔다 갔습니다. 작은딸은 추석을 맞으며 진행하는 체육경기 종목 훈련 중 다리 힘줄이 끊겨 기브스를 하고 있어 오지 못한다고 이미 선물과 용돈을 보내 왔고 큰딸과 손녀만이 추석이라 찾아 왔습니다.
그래서인지 올 추석명절은 왠지 조금 쓸쓸합니다만 손녀가 예쁜 색동 한복을 차려 입고 찾아와 조금이나마 무거웠던 마음이 가벼워지기도 했습니다. 저는 색동 한복을 예쁘게 차려 입은 손녀와 함께 성당을 찾아 하늘나라에 계시는 부모님께 감사의 봉헌 미사를 드렸습니다. 조금 늦은 아침을 먹고 집에서 20분 거리에 있는 임진각을 찾았습니다.
임진각으로 들어가는 입구 도로에는 코스모스 꽃이 활짝 피어 있어 가을 냄새가 풍겼습니다. 까만 정장에 흰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맨 중년 남자 분이 달리는 차 창문 밖으로 손을 내밀어 헬리콥터를 향해 손을 흔들어 줍니다. 멋있어 보이기도 합니다. 젊은 남녀 연인들이 코스모스 꽃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는데 그 속에 의미 있는 두 분이 있었습니다.
한 노부부가 젊은이들 못지않게 활짝 핀 코스모스 꽃밭에 묻혀 사진을 찍고 있었는데, 너무 멋져 보였습니다. 부러웠습니다. 차에서 내린 저는 남편과 함께 손녀 셋이 코스모스 꽃밭 속으로 들어 가 서서는 무작정 셔터를 누르게 했습니다. 무뚝뚝한 남편이 마치 어린 소녀 같다고 한마디 합니다. 정말 이 모든 것이 한 장의 그림 같았습니다.
드디어 임진각 광장으로 들어갔습니다. 망배단 위에는 이미 제사상이 차려져 있고 고향에 갈 수 없는 실향민들과 탈북자분들이 고향에 두고 온 부모형제들을 위해 차례를 드리고 있었고 하늘에서는 헬리콥터 한 대가 기념 촬영을 하느라 돌고 또 돌고 있었습니다. 어른들의 마음을 알 리 없는 어린이들은 헬리콥터를 보고 좋아라 손뼉도 치고 손을 흔들어 주기도 하면서 소리도 지릅니다.
통일교에 있는 이정표에는 평양까지 208km라는 숫자가 빤히 보입니다. 한눈에 안겨 오는 고향을 보면서도 갈 수 없는 고향 하늘을 우러러 보며 넋을 잃고 한참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이런 할미의 마음을 알 수 없는 9살짜리 손녀는 할미와 함께 풍선을 날리러 왔던 곳이라고 옆에서 쫑알쫑알 대면서 하는 말이 오늘은 왜 북한 말을 많이 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머리를 갸웃거립니다.
제 옆에 있는 한 분 역시 통일대교를 바라보며 긴 한숨을 쉬고 있습니다. 고향이 평안도 양덕이라고 합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셨는지 살아 계신지 모른답니다. 이산가족 상봉을 여러 번 신청해 보았지만 매번 승인이 안 된다고 합니다. 순간 저는 외삼촌이 생각났습니다. 사실은 저의 어머님 고향이 양덕이고 외삼촌 역시 1.4후퇴 때 이곳 남한으로 오셨거든요.
혹시 아는 분이 아닌가 하고 물었더니 반가워하며 잘 아는 분이라고 합니다. 삼촌이 사망하기 전에 자주 친목회도 다녔다고 하면서 얼굴도 모르던 조카분을 만났다는 얘기를 들은 적 있다고 합니다. 그분과 함께 점심식사를 함께 하면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기도 했고 조금은 오래된 얘기지만 제가 고향에 있을 때 양덕에 다녀온 얘기를 해드렸습니다. 80이 넘으신 그분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눈물을 하염없이 흘립니다. 6.25전쟁 당시 군 도피자로 몰리자 부모님의 말씀대로 산에 숨어 지내다가 후퇴 시기 이곳 한국으로 오셨다고 합니다.
그분과 헤어져 우리는 농장으로 갔습니다. 올해 대추나무 두 그루를 심었는데 대추가 4알이 달렸거든요. 대추 4알을 네 말로 생각하고 빨갛게 익은 대추와 배를 수확했습니다. 줄당콩을 따기 시작했습니다. 제 마음은 흐뭇합니다. 알알이 깐 줄당콩을 저는 여러 몫으로 나누어 몫을 지어 봉지에 담았습니다.
올 추석은 조금 아쉬운 명절이었지만 저에게는 사랑도 행복도 풍성한 명절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LA갈비찜에 장어구이에 고사리 나물, 새콤달콤하게 무친 도라지에 제 손으로 직접 담근 오디술을 한잔 했습니다. 둥근 보름달을 바라보며 소원도 빌었습니다.
둥근 보름달을 보니 더더욱 어머님 생각이 났습니다. 아주 어린 시절 둥근 보름달을 볼 때마다 어머님은 우리 형제들에게 달 안에는 두 마리의 토끼 형제가 절구질을 하며 오손도손 화목하게 살고 있다고 얘기해줬거든요.
다시 한 번 북녘 하늘을 우러러 고향을 그려 보았습니다. 올 추석 형제들은 어떻게 보내고 있을까, 부모님의 산소는 찾아 갔을까, 풀은 깔끔하게 깎아 주었을까, 부모님은 아직도 나를 기억하실까, 언제이면 나도 우리 형제들과 함께 부모님 산소를 찾아 갈 수 있을까.
그 옛날에는 명절이나 되어야 흰쌀밥을 먹을 수 있고 새 옷을 입어 볼 수 있었지만 지금은 매일 고기 구워 먹고 매일 좋은 옷을 입을 수 있어 명절이 따로 없다고 하지만 고향이 그립습니다. 부모 형제가 그립습니다. 한곳에서 싸우고 지지고 볶고 살던 그 시절이 그립습니다. 부모님 집에 모여 전 부치고 떡치고 나물 무치고 생선 굽던 그 시절이 하염없이 그립습니다.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서울에서 김춘애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