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성한 수확이 기쁘지 않은 북한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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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처럼 하얀 햅쌀밥을 한술 입으로 넣는 순간 씹을 새 없이 벌써 입안에서 솔솔 녹아 넘어 갑니다. 김이 물몰 나는 따끈한 햅쌀밥, 기름이 찰찰 흐르는 햅쌀밥은 특별한 반찬이 없이도 별미입니다. 하얀 흰쌀밥 한 그릇을 앞에 두고도 쉽게 먹을 수 없네요. 고향 생각과 두고 온 부모형제들이 그리워집니다.

북에서 통 밀쌀80% 흰쌀20%의 식량 공급을 받던 시기에 어쩌다가 찾아오신 친정 부모님에게 흰쌀밥 한 그릇 대접하기가 어려워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데 제 심정을 헤아려 보시듯이 잡곡밥을 먹어도 둘째집이 편하다고 하시던 아버님 말씀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시부모님이든 친정 부모님이든 오실 때마다 흰쌀밥 한 그릇 제대로 대접 못해 야속해 하는 제 마음을 알 리 없는 철부지 어린 아들은 밥에 섞여 있는 통밀 알을 한 알 한 알 골라내며 할아버지 할머니들 때문이라고 투정하던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아픕니다.

또한 저에게는 흰쌀하면 눈에 흙이 들어가도 잊을 수 없는 아픈 기억이 있습니다.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면서 갑자기 식량 공급이 끊겨 우리 아이들에게 흰 쌀밥 한 그릇 배불리 먹이는 것이 소원이었던 어려운 시절이 있었거든요. 제 인생에 있어서 그때는 정말 하루하루가 최악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지금도 문득문득 납니다.

어린 아들이 능쟁이 독이 온 몸에 퍼져 퉁퉁 부어 고통을 겪고 있을 때였습니다. 아들을 잔등에 업고 병원으로 달려갔는데 의사의 처방은 온 몸에 퍼진 능쟁이 독을 해소시키려면 흰쌀을 씻은 물을 먹이라고 합니다. 이미 식량 공급이 끊긴지 오래 된지라 집에는 쌀 한 알 없었습니다. 한 마을에 살고 있는 군인 가족에게 햅쌀이 나오는 가을에 갚아 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흰쌀 1kg을 빌려 왔습니다.

당시 북한당국은 햅쌀이 나오는 가을에 가면 어느 정도의 밀린 식량 공급을 해준다는 선전 사업을 했었거든요. 하기에 내 가족뿐만 아니라 평양시 시민들은 흰 쌀밥을 먹을 그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기다렸지만 햅쌀이 나오는 가을이 지나고 설날이 왔지만 흰쌀 공급은 없었습니다. 이듬해 2월 16일 태국에서 수입한 이모작인 알람미 2일분 량을 공급해 주었습니다.

파리 빨아 먹다 남은 것처럼 기름기 하나 없고 푸실푸실한 밥이었지만 아이들은 그나마도 흰 쌀밥이라고 맛있게 먹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조금 어리석은 생각이었지만 그 때에는 부족한 것이 많은 이 엄마에게서 태어난 우리 아이들을 보면 볼수록 너무도 마음이 아팠습니다. 흰쌀하면 잊을 수 없는 일이 또 있습니다.

평양에서 인민반장 하며 받는 한 달 월급이라 해보았자 겨우 여름철 풋고추 1kg값이 되나마나 한 돈이었습니다. 남편 월급과 제 월급을 합쳐도 겨우 흰쌀 1kg 구입할 수 있는데 하루는커녕 한 끼의 식량도 해결이 되지 않았습니다. 돌을 먹어도 소화시킬 수 있다는 10대 한창 나이의 우리 아이들, 또 먹으면 먹는 만큼 쑥쑥 자라는 우리 아이들의 식성을 두고 야속하다는 생각을 한 적도 없지 않았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생각을 했다는 자체가 부모로서 또 엄마로서 할 짓이 아니었습니다.

이곳 한국에 온 지 많은 세월이 지났지만도 좋은 것을 먹고 입고 쓰고 할 때마다 특히 추위를 앞두고 오곡이 물결치는 가을이 오면 고향에 두고 온 형제들뿐만 아니라 내 가족이 지난 어려움을 겪었던 그 시절을 아무리 잊으려고 애써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지나간 그 아픔을 잊기엔 너무도 가슴에 남아있는 상처가 큽니다.

이런 가슴의 응어리를 치유하기 위해 언제나 저는 제일 좋은 쌀을 구입해 밥을 짓습니다. 이번 추석에도 우리 아이들에게 햅쌀 한 포대와 여름에 심고 가꾼 줄당 콩을 똑같이 나누어 주었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부터 이곳 한국으로 오기 직전까지 너무도 많이 들어 왔습니다. ‘인민들에게 기와집에서 비단옷을 입고 흰 쌀밥에 돼지 고깃국을 먹이고 싶다는 말. 김씨 세습왕조의 통치자들이 3대에 걸쳐 주민들에게 되풀이 하며 약속한 말, 50년을 들어 왔습니다만 흰 쌀밥에 돼지 고깃국은커녕 주민들은 지금도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북한에도 지금 한창 가을걷이 수확철이라 하지만 주민들에게 차례지는 몫은 너무도 부족하다고 합니다. 옛날 같으면 풍년이 들었다고 북, 쟁기치고 어깨춤을 추었지만 지금은 한해 농사를 지어 놓고도 한숨만 커진다고 합니다. 농사를 지은 농민들에게 차례지는 분배 몫은 겨우 3개월분이라 합니다.

1년은 365일인데 실지로 공급되는 식량은 3개월분뿐이니 나머지는 어떻게 무얼 먹고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걱정으로 잠을 이룰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숨소리가 자연히 한숨으로 바뀌고 있다고 합니다. 제가 지난날 그러했듯이 지금도 내 고향 북한의 어머니들은 내 가족에게 또는 내 아이들에게 흰 쌀밥 한 그릇 실컷 먹이는 것이 소원입니다.

북한 주민들의 입장에서는 그저 영화의 한 장면에서나 볼 수 있는 새로운 인생을 살면서 저는 먹을거리가 많은 가을이 오면 더더욱 고향이 그리워집니다. 내 머리보다도 큰 누런 배, 빨간 사과를 비롯한 갖가지 과일과 채소와 고기, 기름 등 뭐든지 고향으로 택배로 보내고 싶습니다. 평택 벌에서 나오는 햅쌀을 구입해 모두 고향으로 보내고 싶네요.

서울에서 김춘애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