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생각 평양생각] 탈북민 국토대행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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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0일부터 22일까지 ‘한라산과 백두산을 잇는 통일을 이야기하는 탈북민 국토 대행진’은 제주도 한라산에서 경기도 파주통일 전망대까지 430여 km를 걷는 긴 여정으로 진행됐습니다. 저도 이 행진에 참여했는데요. 이미 선발대는 9일 아침 일찍 서울을 출발해 제주도 한라산 정상에서 발대식을 시작했고 저를 비롯한 다른 참가자 회원들은 10일 오후 서울 렉싱턴 호텔 15층에서 황장엽 선생님의 서거 2주년 추모행사를 마치고 부산으로 출발했습니다.

새벽 2시쯤 부산에 도착한 우리는 다음 날 아침 9시에 부산역 광장에서 열린 출정식에 참가했습니다. 부산역 광장에 모인 많은 사람들의 관심 속에서 우리는 ‘파이팅’이라는 힘찬 구호를 외쳤습니다. 대학생을 비롯한 부산시민들은 부대행사로 진행된 통일 항아리 깜빠니야(캠페인)와 북한 정치범 수용소의 참상을 알리는 사진 전시회, 북한 주민들의 민주화를 위한 서명에 참여하며 큰 관심을 보였습니다.

하루 종일 열린 행사를 마치고 숙소에 도착한 저는 쉽게 잠자리에 들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친구들과 함께 부산 시내의 야경을 구경할 겸 광안리 해수욕장으로 갔습니다. 광안대교의 야경은 정말 멋지고 웅장하고 화려했습니다. 해수욕장은 가을 밤바람이 쌀쌀했지만 우리는 모래 위에 앉아 들고 간 맥주를 시원하게 마셨습니다. 그리고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작은 불꽃을 들고 ‘나 잡아 봐라’ 하면서 서로 뛰어다니며 불꽃놀이도 하고 배를 쥐고 온 바닷가에 울려 퍼지도록 웃고 떠들었습니다.

마치 어린 시절로 다시 돌아온 소녀 같았습니다. 바짓단을 올리고 바닷물에 들어가 사진도 찍고, 모래 백사장 위에 누워도 보고, 새벽 2시까지 그렇게 지금의 즐거운 시간과 지나간 세월 타령으로 시간을 보냈습니다.

우리는 이번에 국토 대행진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북한 사회의 실상을 알리기 위해 황장엽 선생님이 살아생전에 직접 쓰신 ‘반독재’라는 책자와 탈북자들이 쓴 수기 ‘자화상’, 그리고 만화 잡지로 되어 있는 ‘요덕 스토리’ 책자를 나눠주었습니다.

이번 국토 대행진에서 가장 감명 깊었던 것은 대전에서의 서명 운동이었습니다. 어린이들이 서로 앞을 다투며 고사리 손으로 남북한이 하루 빨리 통일이 되어 북한 어린이들을 만나고 싶다고 또박또박 서명을 하는 모습과 한 젊은 어머니가 어린 자녀들에게 정치범 수용소에서 북한 주민들이 당하고 있는 참상을 하나하나 설명해 주는 모습이 잊히지 않습니다.

또한 대전과 천안에서는 고등학교 남학생들이 좋은 일을 하고 있다며 사진을 찍자고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우리 대한민국의 희망이며 미래인 그들을 보니 마음이 든든하고 대견한 반면 북한당국은 어린이들에게 희망과 꿈을 키워 주는 것이 아니라 공개 총살과 정치범 수용소를 통해 무서움과 공포감을 심어준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습니다.

천안역 앞에서는 앳된 대학생이 우리 탈북자들이 쓴 수기인 ‘자화상’을 한참 들여다보더니 이런 질문을 해왔습니다. 탈북자들의 탈북 자체가 국가 범죄가 아닌지 말입니다. 저는 그에게 어떻게 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답변해 줄까 궁리하던 중 저는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학생은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는가’ 하고 되받아 물었습니다.

그 학생은 잠깐 머뭇거렸습니다. 그리고 저는 북한 주민들이 인권이 없는 독재 속에서 오죽했으면 자유를 찾아 목숨을 걸고 두만강, 압록강을 건너 탈북해 그 험난한 길을 걸어 이곳 대한민국에 오겠냐고 말했습니다.

‘우리도 정든 고향과 부모님이 있다. 오늘도 북한 주민들은 굶주림과 추위에 떨고 있고 인권이란 말조차 모른 채 우물 안의 개구리 마냥 세상을 모르고 살고 있다’고 이야기했고 북한 주민들이 탈북하는 것은 결코 범죄가 아니라고 덧붙여 얘기해주었습니다.

그 대학생은 머리를 끄덕이더니 자리를 떴습니다. 순간 저는 그 대학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우리가 조금 힘들어도 북한 주민들의 현실을 좀 더 알려야겠다고 느꼈습니다. 이번 국토 대행진을 통해 우리 대한민국 국민, 특히 젊은이들에게 안보 의식을 조금 더 높여주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430여 km를 걷는 이번 국토 대행진 중에는 다리를 다친 환자도 생겼고 갑작스런 출혈로 한밤중에 병원에 실려가 응급치료를 받지 않으면 안 되는 친구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50대 중반을 넘은 나이임에도 젊은 친구들 못지않게 대열에서 흐트러짐 없이 계속 흰 깃발을 들고 맨 앞에 서서 걸었습니다.

비록 힘들었지만 그만큼 즐거운 추억을 만들었고, 젊은 시절 군복무를 하면서 강행군하던 모습을 다시 한 번 추억하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남자들은 모두 북한에서 군 출신들이라 북한 군복무시절 야간에 강행군하던 얘기들을 하면서 웃기도 하고 땀으로 흠뻑 젖은 속옷을 벗어 쥐어짜기도 했습니다.

차도 옆으로 걸을 땐 쌩쌩 달리는 차를 보며 조금은 두렵기도 했지만 풍요로운 가을 들녘을 지날 땐 괜히 마음이 들뜨기도 했습니다. 그럴 땐 힘든 것도 잊고 손전화기로 주렁주렁 달린 사과와 감나무를 한 장의 사진에 담아 보기도 하고, 행군을 하는 친구들의 모습을 사진에 담아 보기도 했습니다. 고되지만 많은 사람과 함께 했던 탈북민 국토 대행진은 앞으로 살아갈 제 인생에 큰 힘이 되었습니다.

서울에서 김춘애였습니다.